[신드롬 소믈리에 Ep. 13]
그건 '상처'가 아니라 그냥 '쪽팔림'입니다.
부제: 모기 물린 자국을 총상이라고 우기는 '트라우마' 호소인에게
(딸랑-. 문이 열리는 풍경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가슴을 부여잡는 20대 후반의 손님이 들어온다.
그녀는 자리에 앉기 전 의자를 세 번 확인하고, 컵에 물방울이 맺힌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휴지로 감싼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섬세하다 못해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비눗방울 같은 분이 오셨군요.
풍경 소리에 놀라고, 물컵의 물방울에 질색하고.
세상의 모든 자극이 당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믿는 듯한 표정입니다.
#1. 손님의 증상
"소믈리에님, 제 인생은 상처투성이에요. 저는 온몸이 트라우마 덩어리거든요.
방금 풍경 소리 들으셨죠? 제가 예전에 학교 종소리에 놀란 적이 있어서 '종소리 트라우마'가 있거든요.
그리고 저 오이 냄새나는 피클 좀 치워주세요. 급식 때 오이 먹다 체한 적이 있어서 '오이 트라우마'가 심해요.
얼마 전엔 회사에서 팀장님이 '발표 목소리가 좀 작네'라고 지적했는데, 그날 밤잠을 못 잤어요.
제가 어릴 때 발표하다가 삑사리가 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애들이 웃었던 기억 때문에 '발표 트라우마'가 도진 거죠.
남자친구랑 헤어진 것도 그래요. 걔가 카톡 답장을 1시간 늦게 했는데, 전 남친 생각이 나면서 '읽씹 트라우마'가 와서 숨이 안 쉬어지더라고요.
사람들은 저보고 예민하대요. 하지만 어떡해요? 제 뇌가 그렇게 기억하는걸.
저는 세상이 너무 무서워요. 어디를 가도 제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지뢰밭 같아요.”
#2. 소믈리에의 진단
(손님이 나열하는 수많은 트라우마 리스트를 듣다가, 피클 접시를 아주 조용히 치운다.)
손님, 당신의 이야기에 나오는 사건들은 '재난'이 아닙니다. 그냥 살다 보면 겪는 '해프닝'이죠.
당신의 진단명은 [초미세 불편의 재난화 증후군]
(Micro-Discomfort Catastrophizing Syndrome)입니다.
당신은 지금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오남용하고 있습니다.
트라우마는 생명을 위협받거나 정신이 붕괴할 정도의 큰 충격을 말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기분이 좀 나쁘거나, 쪽팔리거나, 싫은 것을 모조리 트라우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당신이 오이를 못 먹는 건 트라우마가 아니라 그냥 '편식'이고,
발표 지적받고 기분 나쁜 건 상처가 아니라 '성장의 기회'이며,
종소리에 놀란 건 그냥 당신의 '담력'이 약한 겁니다.
#3. 테이스팅 노트
이 증후군의 맛은, 캡사이신을 뿌린 솜사탕 같습니다.
겉보기엔 연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남들을 통제하려는 아주 매운 독기가 들어있죠.
당신이 모든 것을 트라우마라고 부르는 진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나 건드리지 마, 나 배려해, 나한테 맞춰"라고 세상에 경고장을 날리기 위해서입니다.
'트라우마'라는 딱지를 붙이는 순간, 당신은 '보호받아야 할 피해자'가 되고 남들은 가해자가 되니까요.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모기에 물린 것을 총상 입었다고 우기면, 진짜 총상을 입은 사람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당신이 엄살을 부리며 숨는 동안, 당신의 마음 근육은 점점 퇴화해서 나중엔 종소리가 아니라 바람 소리에도 쓰러지게 될 겁니다.
#4. 오늘의 처방
당신의 언어 습관을 고쳐 마음의 맷집을 키우는 처방입니다.
오늘부터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압수합니다. 대신 이 단어들을 쓰십시오.
[쪽팔림, 기분 나쁨, 내 취향 아님, 서운함]
"발표 트라우마가 있어서." (X)
-> "지난번에 실수해서 좀 쪽팔렸는데, 이번엔 잘해보자." (O)
단어만 바꿔도 당신은 '피해자'에서 '경험자'로 신분이 바뀝니다.
과거의 나쁜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자신에게 물으십시오.
"그래서 그때 내가 죽었나? 큰일이 났나?"
오이 먹고 체했지만 안 죽었고, 발표 망쳤지만, 세상 안 무너졌습니다.
별일 아니었음을 뇌에 인지시키십시오.
피클 하나를 딱 10초만 노려보십시오.
이건 당신을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그냥 절인 채소 덩어리일 뿐입니다.
피하지 말고 직시할 때, 비로소 그놈의 가짜 트라우마 껍데기가 깨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