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 소믈리에 Ep. 1]
착한 아이는 개뿔, 이건 '도덕적 결벽증'입니다.
부제: 도로 위 킥보드와 싸우다 전사한 당신에게
(딸랑-. 풍경 소리와 함께 첫 번째 손님이 절뚝거리며 들어온다. 발목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다.)
어서 오십시오, 신드롬 테이스팅 룸의 첫 번째 손님이시군요.
그런데... 걸음걸이가 영 불편해 보이십니다.
어디서 넘어지기라도 하셨습니까?
아... 그 표정을 보니 알겠습니다.
또 '아무도 시키지 않은 영웅 놀이'를 하다가 다치셨군요.
자, 여기 얼음찜질팩부터 받으세요.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해 보시죠.
이번엔 누구를 구하려다 그리되셨습니까?
#1. 사건의 전말
"소믈리에님,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너무 억울해서 잠이 안 와요.
딸아이랑 길을 걷는데, 전동 킥보드 한 대가 인도 한복판에 떡하니 누워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혀를 차거나 피해 가더라고요.
그걸 보는데 마음이 너무 불편한 거예요. 유모차라도 지나가면 어쩌나 싶고...
그래서 제가 '이걸 좀 치워야겠다' 하고 낑낑대며 옮기려 했죠.
그런데 그 순간!
삐-! 삐-! 삐-!
도난 방지 경보음이 미친 듯이 울리는 거예요. 당황해서 허둥대다 킥보드랑 같이 넘어졌고, 제 발목은 킥보드 밑에 깔려버렸죠.
지나가던 사람들은 절 무슨 킥보드 도둑 보듯 쳐다보고... 너무 창피하고 아팠어요.
더 기가 막힌 건 딸아이 반응이에요. 절 일으켜 세우면서 이러더군요.
'엄마는 착한 아이 신드롬(Good Girl Syndrome)이야. 뼛속까지 착한 것도 아니면서, 착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사서 고생을 해.'
제가 정말 위선적인 건가요? 전 그냥 도울 생각이었는데...“
#2. 소믈리에의 진단
(손님의 멍든 발목을 유심히 살피며)
음... 욱신거리는 발목에서 '억울한 선의'의 향기가 아주 진하게 나는군요.
따님분의 통찰력은 아주 훌륭하지만, 진단명은 수정해야겠습니다.
손님, 당신은 '착한 아이'가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누가 봐주지도 않는데 혼자 끙끙댄 걸 보면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인정 욕구 때문도 아니고요.
당신의 진짜 병명은 [도덕적 결벽에 의한 자발적 순교 증후군]
(Voluntary Martyrdom by Moral Fastidiousness)입니다.
당신은 그저 눈앞에 놓인 '무질서(쓰러진 킥보드)'를 참을 수 없었던 겁니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저 '도덕적 오답'을 내가 바로잡지 않으면, 내 마음이 찝찝해서 견딜 수 없는 상태...
마치 삐뚤어진 액자를 보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는 것처럼요.
그래서 스스로를 도로 위의 십자가, 아니 킥보드 밑에 던져 희생한 것이죠.
#3. 테이스팅 노트
이 증후군이 가진 맛은 씁쓸합니다. 왜냐고요?
관객도 없고, 박수도 없으니까요.
킥보드를 아무 데나 던져놓은 사람은 당신이 다친 줄도 모르고 꿀잠을 자고 있을 겁니다.
길을 지나던 사람들은 당신을 '시민 영웅'이 아니라 '왜 저러나 싶은 아줌마'로 기억하겠죠.
경보음 소리는 마치 세상이 당신에게 보내는 경고 같지 않습니까?
"제발 가만히 좀 있어! 네 일 아니잖아!"라고요.
따님 말이 맞습니다. 이건 순수한 선함이라기보단 '강박'에 가깝습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감? 아닙니다.
'불편함'을 보면 참지 못하는 예민함입니다.
당신은 착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의 무례함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인간 필터'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겁니다.
#4. 오늘의 처방
멍든 발목과 상처 입은 마음을 위한 처방을 내려드리겠습니다.
다음에 또 길을 막고 있는 킥보드나 쓰레기를 발견하신다면,
속으로 딱 세 번만 이렇게 주문을 외우십시오.
"저것은 킥보드가 아니다. 현대 미술 조형물이다."
"저것은 킥보드가 아니다. 설치 예술이다."
"원래 저기 있어야 해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냥 피해 가십시오.
당신의 그 고귀한 발목은 세상을 청소하는 데 쓰기보다, 따님과 맛있는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데 쓰여야 마땅합니다.
세상의 모든 무질서를 당신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습니다.
가끔은 '못 본 척하는 무심함'이 당신의 건강을 지키는 최고의 영양제가 될 것입니다.
그래도 킥보드를 치우려 했던 당신의 그 마음...
멍청하리만치 무해하고 다정했다는 건 제가 기억해 드리겠습니다.
이 멍은 며칠 뒤면 사라지겠지만, 당신의 그 다정함은 흉터처럼 남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