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 소믈리에

[신드롬 소믈리에 Ep. 23]

by 린나이

상자 속에 갇힌 당신의 설렘은 유효기간이 지났습니다.

부제: 택배 상자를 뜯는 것보다 쌓아두는 것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당신에게


(딸랑-. 문이 열리고 30대 여성 손님이 들어온다.

그녀의 옷소매에는 박스 테이프 조각이 하나 붙어있고, 가방 안쪽에서는 뽁뽁이라고 불리는 에어캡이 살짝 비친다.

자리에 앉으면서도 휴대폰으로 배송 완료 알림 문자를 확인하지만, 표정은 숙제를 미뤄둔 어린아이처럼 무겁다.)


어서 오십시오. 현관 앞에 종이 성벽을 쌓고 사시는 분이 오셨군요.

방금 휴대폰을 확인하실 때 입가에 미소가 번졌지만, 곧바로 한숨을 내쉬는 걸 봤습니다.

기다리던 그 물건이 드디어 도착했나 보군요.

그런데 왜 당장 달려가서 상자를 열지 않고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혹시 상자 속에 든 것이 보물이 아니라 폭탄이라도 된다고 믿으시는 건가요?


#1. 손님의 증상


"소믈리에님, 저 정말 미치겠어요.

물건을 고를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요.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의 그 짜릿함 때문에 쇼핑하죠.

배송 추적 페이지를 새로고침하며 택배 기사님이 어디쯤 오셨는지 실시간으로 감시해요.

제 가슴을 뛰게 하는 건 오직 그 배송 중이라는 세 글자뿐이에요.

그런데 막상 현관 벨이 울리고 택배가 도착하면 상황이 달라져요.

문 앞에 놓인 상자를 보면 갑자기 귀찮음이 몰려와요.

박스를 뜯고, 물건을 꺼내고, 쓰레기를 분리배출하는 그 모든 과정이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죠.

그래서 하나둘 거실에 쌓아두기 시작한 게 이제는 제 키만큼 커졌어요.

분명 제가 원해서 산 것들인데, 상자만 봐도 숨이 막혀요.

열지 않은 상자 속에는 제가 꿈꾸던 완벽한 물건이 들어있을 텐데, 막상 열어서 실물을 마주하면 그 환상이 깨질까 봐 무서운 걸까요? “


#2. 소믈리에의 진단


(손님의 옷소매에 붙은 테이프 조각을 떼어내며 조용히 건넨다.)


손님, 당신은 물건을 산 게 아닙니다. 당신은 가능성을 산 겁니다.

당신의 진단명은 [미개봉 가능성 보존 증후군]

(Unopened Possibility Preservation Syndrome)입니다.

당신에게 택배 상자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습니다.

상자를 열기 전까지 그 안의 물건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존재하죠.

하지만 상자를 여는 순간, 그것은 먼지가 쌓이고 관리가 필요한 평범한 현실의 물건이 되어버립니다.

당신은 그 찰나의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상자를 뜯지 않고 방치하는 방어 기제를 발동한 거예요.

또한 당신은 도파민의 결말을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구매와 기다림에서 오는 즐거움은 충분히 즐겼으니, 이제 그 물건을 실제로 사용하는 수고스러움은 회피하고 싶은 거죠.

당신에게 쇼핑은 소유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지루한 일상에 투척하는 일회용 설렘 주사였던 셈입니다.


#3. 테이스팅 노트


이 증후군의 맛은,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빈 공기 빵 같습니다.

한 입 베어 물기 전에는 무척 달콤해 보이지만, 정작 입안에 남는 건 허무함뿐이죠.

상자를 쌓아두는 행위는 당신의 집을 창고로 만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마음속에도 처리하지 못한 부채감을 쌓아둡니다.

"아, 저거 뜯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니, 휴식을 취해도 개운하지 않죠.

당신은 물건을 얻은 게 아니라, 뜯어야 할 숙제 더미를 돈 주고 산 꼴입니다.

뜯지 않은 상자가 늘어갈수록 당신의 공간은 좁아지고, 당신의 자존감도 그 상자 틈새에 끼어 납작해지고 있습니다.


#4. 오늘의 처방


현관 앞의 종이 성벽을 허물고, 물건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처방입니다.


기다림의 강도를 낮춰야 합니다.

언제 오나 목 빼고 기다리지 마십시오.

잊고 있을 때쯤 찾아오는 선물처럼 택배를 맞이해야, 도착했을 때의 피로감이 줄어듭니다.


쌓여있는 상자를 한꺼번에 치우려 하지 마세요. 질려서 다시 포기하게 됩니다.

오늘 밤, 가장 작은 상자 하나만 골라 정성스럽게 뜯어보십시오.

그리고 그 물건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놓아주세요.

상자를 비우는 건 쓰레기를 치우는 게 아니라, 당신의 공간을 되찾는 의식입니다.


결제하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일단 장바구니에 담고 딱 하루만 기다리십시오.

다음 날 다시 봐도 그 물건이 상자 속에 갇혀 있어도 좋을 만큼 간절한지 스스로 물어보세요.

대부분은 결제 버튼을 누르고 싶었던 손가락의 충동이었음을 깨닫게 될 겁니다.


자, 이제 돌아가셔서 현관문에 걸린 그 무거운 자책감을 먼저 뜯어내시죠.

상자 속의 물건도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다 지쳐가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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