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무변한 세계 속, 겸손의 필요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고서야 어찌 알겠는가? 광대무변한 세계의 즐거움이 당신의 오감에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 윌리엄 브레이크 (천국과 지옥의 결혼) -
내 생각: 광대무변한 세계. 나는 끝내 그 세계를 다 알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러니 세상 다 안다는 착각 하지 말자.
언제까지나 회사의 막내일 줄 알았던 내 밑에 후배가 적지 않게 들어왔다. 그 후배들 중 그나마 나를 덜 어려워하는(것 같은) 후배 A를 선택해 밥을 사주었다. A와 대화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다. 회식 자리에서 언제나 윗분들 말씀에 고개만 끄덕끄덕이던 나. 후배 앞이라고 끄덕끄덕 대신 말주변을 늘어 놓았다.
"회사에서 승진이 중요하다고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회사는 언제든지 너를 내쫓을 수 있어. 그러니까 회사 안에서 아등바등하지 말고 너의 가치를 회사 밖에서 펼쳐."
"퇴사할 수 있을 때 얼른 나가. 머뭇거리다가 나이가 발목 잡는다."
평소 입 밖으로 내 뱉지 못하고 속으로 품어왔던 생각을 마음껏 꺼냈다. 나를 닮은 후배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끄덕였다. 게다가 나보다 더 훌륭한 맞장구와 추임새로 '맞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즐겁게 호응을 해주었다.
100% 진심이 아닌 호응이었을지라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내가 후배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 대단한 사람으로 비춰진 것 같아 스스로 너무 멋졌다는 자긍심이 신경감각을 붕 뜨게 했다.
여느때와 다름 없는 회식자리. 상황은 역전되어 평소처럼 상사에게는 지혜의 말씀, 나에게는 잔소리 같은 말을 억지로 들어야 했다.
"회사의 꽃은 승진이야."
"회사 안에서의 너의 존재 가치를 높여야지."
"경쟁에서 이겨 높이 올라가야 한다."
멍해진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속으로 성의 없는 "네... 네..."를 꿀꺽 삼켰다. 지겨웠다. 고리타분했다.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회사 생활에 진심인 상사. 사실 내 눈에는 그리 대단해보이지도 멋져 보이지도 않는다. 노력을 기울인 만큼 회사와 윗사람이 보상해줄거라 굳게 믿는 것 같은 충성스러운 그. 그가 조금 불쌍했다.
며칠 뒤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니고서야 어찌 알겠는가? 세계의 즐거움이 당신의 오감에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문장을 읽으며 조금 창피해졌다. 후배에게 자신 있게 생각을 설파했던 나. 직장 상사에게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던 나. 두 장면의 내가 오버랩 되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과연 세상을 알기나 하는 걸까?'
나를 뒤돌아보았다.
나의 믿음은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인가? 아니오.
나의 믿음을 절대적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아니오.
내가 믿지 않는 모든 것을 내 경험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는가? 아니오.
나름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굴곡진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해 대단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많은 도전으로 풍부한 실패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좋은 유전자 덕분에 특별한 통찰력을 타고나지도 않았다. 나는 평범하다. 그렇게 평범한 내가 그럴 듯 해 보이는 말과 생각을 주워 담았다. 잘 나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치장했다. 그 치장은 결국 내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빌려온 것이다. 빌려온 걸 내 것인 것 마냥 으시대고 있었다.
설사 그 치장이 내 것이라고 해도 과연 모든 사람에게 어울리겠는가? 우리 모두는 한 명 한 명 각자 다르다. 성격, 생활환경, 욕구, 꿈, 재능... 인간임을 증명하는 요소 하나 하나가 모두 재각기 다르다. 나에게 어울리는 치장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하거나 너무 무겁거나 너무 가벼울 수 있다.
점점 나이를 먹을 수록 안다는 착각이 딱딱해진다. 형성해온 나의 세계가 콘크리트처럼 굳어져가는 게 느껴진다. 고집이 세지고 나와 다른 생각은 밀쳐내고 들여다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럴 수록 나의 세계가 확장되고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든다. 꽉 막힌 세계에서 수확할 수 있는 결과는 한정적이다. 전과 다를 것 없는 씨 를 뿌리고, 개간하지 않아 척박해져간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안주하고 싶지 않다.
그 나물에 그 밥만 먹는 나를 위해 불편하더라도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새로운 씨앗을 들여오고 정기적으로 땅을 뒤엎어야 한다. 그래야 비옥해진다. 물론 굳어진 세계에서 안락하고 편하게 사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인가? 아니, 나는 세련되고 발전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니 안다는 착각을 하지 말자. 부족하고 잘 모른다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자. 단언하고 확정 짓지 말자. 듣기에 거북하고 불편한 의견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자. 내가 이미 받아들인 생각도 혹시나 틀린 건 아닌지 의심하고 점검하자.
오만하지 말자. 어린아이는 새로운 세계를 거침없이 받아들인다. 어린아이처럼 넓은 세상을 품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