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 글이 될 줄이야
어릴 적, 전쟁이 참으로 무서웠다. TV에서 <전우>라는 한국전쟁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어른들은 모였다 하면 전쟁 얘기를 했다. 전쟁이 왜 일어나야 하는 지 몰랐다. 그저 본능처럼 만약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리했다. 그래서인지 전쟁 꿈을 자주 꿨다. 잠에서 깰 때는 잘 울었다. 집과 학교가 멀어서 전쟁이 나면 동생을 구출해 올 일이 늘 걱정이었다. 하루는 동생 교실에 서둘러 갔는데 동생이 사라졌었다. 또 어느 날 꿈엔 동생이 적군의 총에 맞아 죽기도 했다. 집에 오니 엄마 아빠가 우릴 놔두고 다 피난을 떠난 적도 있었다.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힘든 꿈이었다. 다행히 전쟁터는 늘 집주변이어서 숨는 실력이 날로 늘면서 적군을 따돌리기가 쉬워졌다. 신기했던 건 꿈 속에서 나는 총에 맞아도 죽지 않았다. 죽은 척 하는 내 쪽으로 적군이 다가오는 걸 실눈을 뜨고 지켜봤다. 적군이 내가 죽었는지 확인하느라 이리저리 살피는 순간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집 주변엔 멧돼지나 매가 출몰했다. 검은색 멧돼지가 마당까지 들어왔고 하늘엔 커다란 매가 맴돌다가 마당에 닭을 물고 갔다. 몸집이 작은 우리도 언제든 잡혀갈 수 있기 때문에 집 안쪽에서 문을 꼭 잠그고 집안에 있어야 했다. 멧돼지, 매 말고도 갖가지 들짐승을 여차하면 잡을 수 있도록, 탄알이 장전된 공기총이 마당 한 켠벽에 세워져 있었다. 놀이가 필요했던 오빠들이 하필 그 총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 총알이 발사됐고, 큰 오빠의 팔뚝에 까맣고 동그란 총알이 박혔다. 상황은 어찌 어찌 수습됐지만, '그 때 자칫 몸통을 겨냥했으면 어쨌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집은 늘 혼자 있기엔 무서운 곳이었다. 우리집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절이 하나 있었다. 가끔씩 탁발하러 오시는 스님들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목탁소리에 맞춰 한참을 되뇌는 염불 소리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듯 숨 죽이고 살금 살금 다가가 대문 고리를 꼭 잡고 그가 갈 때까지 대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동안 심장 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릴까 무서웠다.
공간감각이 정말 없는 나는 세상은 얼마나 넓은 건지 상상이 안됐다. TV가 생기면서 서울이란 데를 알게 되었고 크면 꼭 서울로 가고 싶었다. 산기슭에 자리한 집은 낮에도 으스스했고, 밤이 되면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하얀 귀신이 여기 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상상에 한 발짝도 밖에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난 꼭 도시에서 살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날은 집에 들어왔는데 아무리 불러도 엄마가 없었다. 분명 방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드득 드득” “엄마아아아~~~!” 하는 수 없이 신발을 신은 채 마루에 살금 살금 올라가 방문을 슬며시 열었다. 방안엔 아무도 없었다. 다시 문을 닫으려는데 '팔뚝만한' 송충이가 방문 창호지 위를 기어가고 있었다. 엄마가 나타날 때까지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고, 얼마나 울었는지 어지러워 앞이 안보였다. 아직도 털 달린 곤충은 질색이다.
어느 날 집에서 엄마를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집안 어디엔가 누군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살금 살금 다가가 문을 조용히 열다가 문소리에 깜짝 놀랐다. 가끔 혼자 있을 때 아주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왜 나는 혼자 있는 거지?" 좀 수상했다. 혹시 ‘누군가’가 나를 시험하려는 거 아냐? 아무도 없는 곳에 나를 혼자 있게 하고 나쁜 행동을 하는지 안하는지 세상 모두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거 같았다. 그 ‘누군가’는 안방 천정 쪽에서 항상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짐작했다. 어떤 때는 ‘엄마, 아빠가 내 편인 걸까, 아니면 그 '누군가' 편일까?’ 그것이 궁금했다. 엄마, 아빠가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할 땐 쓸쓸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누군가'에게 빌미를 잡히지 않도록 착하게 살아야지 맘먹었다. 그 때 만난 상상의 그 '누군가'는 지금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내가 아무도 모르게 좋은 일을 했을 때나 마땅히 말 할 데가 없을 때 살짝 하늘을 쳐다보며, “저 잘한거죠?”라고 말한다. 앞으로도 ‘누군가’는 가끔 내 인생에 좋은 역할을 할 것이다.
아버지는 일 욕심이 굉장했다. 팔봉산 입구에 터를 잡은 우리 집 좌우로 야트막한 산이 줄지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집 왼쪽 엄청 넓은 산이 밭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곳을 '개간밭'이라 불렀다. 해마다 그곳에 농작물을 심었다. 집 오른쪽으로는 과수를 심었다. 사과 나무, 배나무, 복숭아 나무, 자두 나무가 많았는데, 나무가 튼튼해지면서 과일이 많이 열렸다. 우리들이 사용했던 교과서는 분해되어 해충 방지용 과일 봉지로 이용됐다. 우리 형제들은 그 봉지를 만들기도 했고, 아직 어린 과일에 봉지를 씌우기도 했다. 과일이 열리고 익어가는 과정은 신기했다. 매일 쑥쑥 자라는 과일이 나는 공짜라 생각했다. 사람처럼 시시 때때 밥을 먹는 것도 아닌데 자꾸 자라기 때문이다. 노동이라는 걸 아직 모를 나이였기 때문에 그랬다. 때때로 태풍이 불어 과실이 바닥에 다 떨어지기도 했는데 어린 마음에도 너무 아깝고 속이 상했다.
바깥 마당을 빙 둘러 경사진 언덕도 아버지에겐 뭔가 키울 땅으로 보였다. 내가 태어 나기도 전에 이미 작업을 하셨는지, 내가 기억하는 집 주변은 커다란 밤나무가 많았고, 감나무, 앵두나무가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늦가을 바람부는 아침이면 뒷마당에서 후둑 후둑 밤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뾰족한 꼬챙이를 들고 나가 밤송이를 두 발로 꼭 밟고 꼬챙이로 찍으면 머리가 하얀 밤톨이 쏘옥 나왔다. 매끈한 껍질을 입으로 까고, 그 속에 씁쓸한 속 껍질까지 벗기면 노르스름한 밤알이 된다. 야들 야들한 밤을 입에 쏙 넣으면 하얀 즙이 고소했다. 시간이 지난 밤은 잘 까지지도 않고, 물기가 사라져서 씹을 때 머릿 속이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아버지는 개간밭 방향으로 마당에 돼지 우리를 지으셨다. 돼지와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지만, 할 일이 없으면 돼지 우리에서 돼지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밥은 어떻게 먹는지 넋을 놓고 구경했다. 소 외양간은 집안에 있었다. 소에게 풀을 먹이는 일은 쉽고 재밌었다. 소는 내 손에 따뜻한 혀를 낼름거리며 핥았지만 내 손을 씹지는 않았다. 소는 일을 할 때는 집을 비웠다가 밤이 되면 집으로 들어 왔다. 그러면 엄마는 연기가 풀풀 나는 삶은 여물을 소에게 주셨다. 키우는 동물 중에서 소 덩치가 가장 컸다. 부모님은 가축 중에서 소를 가장 소중히 여기셨다. 누구네 집에서 소를 잡아 잔치를 했다고 할 때는 큰 잔치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누구네 소를 팔아서 아들 대학 등록금을 댔다는 소리도 들었다. 외양간 바로 앞 마당에는 몇 마리 어미 닭과 수탉이 어슬렁 거렸다. 알을 낳고 우는 암닭에게 달려가 따스한 알을 엄마에게 날라주는 일도 했다. 수십 마리 병아리가 한꺼번에 부아했다. 마당 한가득 아장 아장 걷거나 뛰는 병아리떼 구경은 정말 재밌었다.
염소도 있었다. 염소는 무섭지 않아서 풀을 주면서 가까이 볼 수 있었는데, "음매애애"를 흉내내면 대화하는 느낌도 들었다. 아버지의 일 욕심 덕분에 우리가 먹을 것은 항상 집안팎에 풍성했다. 어느 날 엄마는 염소의 통통한 배 밑으로 양동이를 들이 밀고 젖을 짰다. 그럼 불룩했던 배가 홀쭉해 졌다. 엄마는 염소 젖을 따뜻하게 데워서 마시라며 주셨지만 나는 마시지 못했다. 그냥 구역질이 났다. 내가 이뻐하던 염소의 몸에서 나온 젖은 먹고 싶지 않았다. 왠지 먹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아랫집 은영이네 집 쪽에서 개가 주기적으로 깨갱 깨갱 우는 소리가 났다. 그 날 저녁 밥상에는 고기가 올라왔다. 아버지는 요아래 은영이네서 개를 잡았다며 많이들 먹으라고 하셨다. '그게 은영이네 개가 죽어가는 소리였구나'. 그 강아지 모습이 떠올라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사람들을 미워하기도, 이해하기도 애매했고 마음은 힘들었다. 그 후로도 나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돼지 고기나 소고기는 맛있게 먹었는데 죽는 광경을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먹는 이 고기가 혹시 내가 아는 집에서 자라던 소나 돼지가 아닐 지 귀를 쫑끗 세우고 엿듣곤 했다.
부모님은 몸이 다 고장나고서야 농사를 그만두셨다. 밭이 노는 것을 보면 몸이 먼저 움직인다면서, 그만 지어야지 그만 지어야지 하면서 농사를 내려 놓지 못했다. 난 농삿일이 세상에서 가장 고된 일이라 생각했다. 부모님이 농사를 그만둘 때까지 고향인 서산에 애정이 없었다. 다른 농촌에 가면 풍경이 눈에 들어왔지만 서산에 가면 부모님의 고생스런 일상이 먼저 떠올라 풍경이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부모님은 평생을 그렇게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을 했고,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한 집은 우리 집을 말하는 거였다. 배우고 싶은 열망이 강제로 꺽인 한을 삭히지 못해 술을 드시면 아버지는 “내가 니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갈칠거니께 배우고 싶은 눔은 공부 열심히 혀”. 수 백 번은 들었던 소리였다. 빈 손으로 출가하여 아이들 넷을 대학을 보내겠다는 일념으로 뼈를 깎는 노동을 견디셨다.
그럼에도 우리 4형제는 무서운 ‘아버지’ 순한 ‘엄마’의 상하 관계가 못마땅했다. 지금도 우린 아버지에겐 존칭을 쓰고 어렵게 말하고 엄마랑은 친구처럼 반말을 한다. 자식들은 엄마 편이었고 엄마만 좋아했다. 아버지의 호통은 예측불허였기 때문에 무서웠다. 엄마가 말대답이라도 안하면 좋으련만, 엄마는 억울한 속 얘기를 계속 내뱉곤 해서 아버지의 부아를 더 치밀게 했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단 하루도 엄마를 걱정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기쁨을 주는 방법으로 열심히 공부할 것을 늘 다짐했다.
어려서 친구들과 편지 주고 받기를 무척 좋아했다. 초등학교 단짝과 매일 만나면서도 쪽지를 주고 받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도 친한 친구들과 자주 편지를 썼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 편지는 큰 보따리가 됐다. 단연 내 보물 1호였다. 대학 시절 이리 저리 자취방과 하숙방을 이사할 때 그 꾸러미를 제일 먼저 챙겼다. 만일 전쟁이 나면 편지 보따리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결혼할 즈음 어느 날 법정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에 빠져들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스님이 선물로 받았던 화분을 누군가에게 주며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하는 그런 내용이 있었다. 울림이 컸다. “어차피 누구나 짧게 살다 죽을텐데, 나도 내 보물 1호를 그냥 버릴까?”하는 생각을 했다. 결국, 신혼집으로 향하는 이삿짐에 편지 꾸러미를 싣지 않았고 쓰레기 더미에 그대로 두고 돌아섰다. 남편이 더 놀랐다. 그 행위로 무엇을 얻었는지는 딱히 잡히는 바는 없지만 그 후로 후회를 여러 번 했다. 괜한 짓 해가지고 소중한 추억만 날아갔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않는 대담함은 길러진 것 같다.
고등학교 때까지 혼자서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사방에 자연이 있었고 볼만한 책이 없었다. TV도 초등학생 되어서야 들어왔기 때문에 혼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은 뭔가를 궁리하거나 상상해야 했다. 대학 졸업 후 언제인지 고등 때 절친으로부터 내가 살고 있던 집으로 편지가 왔다. 내가 그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를 복사해서 보낸 것이었다. “꽤 진지했군.” 편지를 읽으며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내가 쓴 편지는 나에게 남아있지 않았다. 편지를 많이 썼다지만 내가 보관중인 편지는 정작 내가 뭘 했는지를 알려주진 않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뭐라 썼는 지는 나도 모를 일이었다.
대학 때는 토론할 시간이 아주 많았다. 학과 친구들과도 동아리 친구, 선후배와도 만나기만 하면 모든 것을 펼쳐놓고 치열하게 토론했다. 시대가 그랬다. 마음껏 웃으며 교정을 걷는다는 것이 이기적인 행동일 수 있다는 죄책감이 들던 시대. ‘나는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도 많이 고민했다. 아직도 독재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었고, 학생 운동에 깊이 가담한 친구도 있었다. 나는 열심히 행동할 용기도, 무관심할 용기도 없었다. 소위 ‘운동권 서적’을 책꽂이에 가득 꽂아두고 읽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결론을 내긴 어려웠다. 우울할 때는 데모 노래가 수록된 노찾사 테입을 듣고 또 듣으며 울기도 하고 위로도 받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다. 그 책을 읽다가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이러다 정신이 나가는 거 아닐까' 싶어 한밤중에 자취방을 서성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책 내용은 거의 다 잊었다. 하지만, 용기가 없어 앞장서지 못하는 나 자신과 대화를 했다. 그 분의 생각을 가슴에 새기며 평생 가늘고 길게라도 옳은 편에 서겠노라 다짐도 했다.
나는 매우 긍정적인 사람으로 성장했다. 긍정적인 성향으로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많은 칭찬을 받아 그렇게 자란 것인지는 지금도 궁금하다. 내가 좀 더 행복하게 살면 부모님의 고통이 줄어들거라 믿었다. 만일 정말 신이 있다면 사람들이 불평등하게 살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불공평한 겉보기와는 달리 모든 사람들을 결국 평등하게 만드는 비밀 공식을 숨겨놨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뭔지 궁금했다.
초등 시절 죽은 사람을 묘지로 싣고 집앞을 지나가는 상여 행렬을 가끔 볼 수 있었다. 관속에 누워있는 그 죽은 사람의 외로운 모습을 상상했다. '그 사람의 혼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가 없어도 세상은 이전처럼 똑같이 돌아간다는 걸 그는 지금 알고 있을까? 오늘 내가 죽어도 세상은 아주 잘 돌아갈 것이라는 대목이 싫었다. 난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다. 가끔은 어린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러면 한참을 또 생각해야 했다. 그 아이의 이른 죽음을 통해서 신이 전하는 의미는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생을 꽃피우지도 못하고 그리 쉽게 데려갈 바엔 차라리 이 세상에 보내지를 말지... 정답 없는 이 의문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월이 참 빠르다는 사실에 공감하게 되었다. 100년을 사나 10년을 사나 어쩌면 '큰 시선'으로 보면 차이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오래된 그 의문에 부분적인 답을 얻었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아주 넓은 도서관을 만났다. 전공 공부나 시험 공부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책 냄새 가득한 도서관의 그 운치가 마음에 들었다. 문학은 마음을 아프게 했다. 문학을 통해 공감하는 법을 더 배웠지만 문학은 읽는 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주인공들의 괴로움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거나 작가의 설정 쯤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작품 하나를 읽고 나면 며칠을 헤매곤 했다. 주인공의 고뇌가 늘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피로한 모습과 겹쳐져 책을 읽으면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심리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하면서 힘겨운 문학에서 눈을 밖으로 돌리게 되었다. 심리학 강의는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에 마냥 좋아서 넋을 놓고 빠져들었다. 그 때까지 모든 사람을 한 덩어리로 분류했던 것보다 사람의 차이를 설명하는 여러가지 틀을 알려주어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더 쉬워졌다.
지나치게 부푼 감성에 바람을 빼주고, 냉철함과 논리를 갖게 만든 것은 소위 ‘운동권 서적’과 사회과학 서적이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개인의 문제를 전체 구조 속에서 파악하는 힘을 얻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큰 틀에서 나의 위치를 찾는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고통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고, 일정 집단이 비슷하게 겪는 일이었다. 노동에 지친 부모님과 두 분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으로 지쳤던 나를 어느 정도 해방시켰다. 나의 사고를 한 번 더 구획하게 만든 계기는 사회 과학 서적의 최신 장르인 여성학 도서를 통해서 왔다. 내가 누군가에 의해 해석되지 않고, 누군가 때문에 생각을 억지로 교정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친구가 준 <나는 나>라는 책을 시작으로 수십권을 읽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나는 시골 소녀의 막연한 불안감을 거의 다 해소하고 있었다.
졸업할 무렵이 됐지만 사회로 나갈 자신이 없었다. 좋은 직장을 보장할 학점도 아니었고, 이 많은 자유를 뒤로 하고 어느 한 곳에 평생을 묻을 마음의 준비가 안끝났다. 시간에 밀려 영문학 대학원에 합격은 했지만 도피처럼 정해진 진로라 허전했다. 그 무렵 호주로 6개월 어학연수를 다녀온 동아리 언니가 내게 호주에 다녀오길 권했다. 그 만남이 나는 축복이라 여긴다. 대학 시절 내내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생활비를 벌었고, 졸업 앞뒤로 2년 가량 잠실의 교습소에서 영어 수업을 했다. 마음이 넉넉한 여자 원장님은 인생에 대한 조언도 많이 해주셨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나의 많은 부분을 알고 싶어하셨다. 원장님 덕분에 나는 대학 졸업 후 당시로서는 꽤 큰 금액을 저축해 두었다. 영문학 대학원을 포기하고 호주로 가기로 맘먹었다. 나는 아버지께 호주행 계획에 대한 허락을 구하러 단걸음에 시골집에 내려갔다. 아버지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시며 "난 우리 딸은 무조건 믿으니께. 그려 갔다와!" 그랬다. 엄마는 허락 대신 울고 계셨다. 백마디 잔소리나 훈계보다 사람을 바로 서게 하는 힘은 아버지의 "믿는다" 한마디에 있었다. 호주 항공기 콴타스에 몸을 싣고 하늘로 오를 때 심장이 부푸는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탄 것만으로도 내가 엄청 커지는 기분을 느꼈다.
계획했던 3개월 어학연수를 마치고 계획을 수정했다. 시드니 대학 '영어교육학(TESOL)' 석사 과정을 시작했다. 대학교 때 모은 돈은 오빠에게 맡기고 아주 작은 용돈만을 손에 쥐고 호주로 갔었다. 한국인 언니들에게 "저 일을 구해야 해요"라고 호소했더니 금세 기회가 왔다. 호주에 도착할 뒤 1주일 무렵 한인이 운영하는 <TOP 신문사>에서 취재 및 번역 기자를 찾고 있었다. 궁하니 통했다. 그 일을 하면서 객관적인 글쓰기를 연습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호주 국내외 뉴스를 꾸준히 보면서 시각이 다양해졌다. 다행히 공부와 동떨어지지 않은 일자리였지만, 공부할 시간은 늘 부족했다. 그럼에도 '농부의 딸로 태어나 유학생활을 하다니 이 얼마나 호사로운 일이야!'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일하고 배웠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 제발로 한인교회를 찾아갔다. 열심히 사는 청년을 도우려는 정서가 가득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2세들을 위한 <한글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게 되었다. 호주에 살면서도 영어가 도무지 익지 않는 이민자 1세 집사님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또 방학엔 '한국영사관'에서 2세들을 위한 한글교재 제작 의뢰를 두번이나 받았기 때문에 등록금을 내 손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2년 반 정도 호주에 있었는데, 2년차에는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두고 온 통장을 털어서 등록금을 냈다. 같은 과 친구들은 내게 참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특히, 태국에서 오신 분들은 나를 딸처럼 예뻐해주셨다. 얼마나 열심히 산 건지, 학과 친구들은 나를 'Busy Bee"라 불렀다. 시험 기간에 과로로 탈진하여 도서관에서 쓰러졌는데, 학교 양호실 같은 데서 잠을 잤던 기억이 있다.
하루는 교회에서 '죽음 체험'이라는 걸 했다. 사람이 죽으면 들어가는 관을 예배당에 가져다 두고 한 명씩 그 안에 30초간 누워보는 체험이었다. 긴 신도들 줄 속에 나도 서 있었다. 어릴 때 친구 따라 교회 '여름성경학교'에 갔었다. 척 봐도 교회는 도시 문명을 닮아 세련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맛있는 간식을 많이 줬다. 교회는 공포스럽기만 한 사후 세계에 대한 답변도 명쾌하게 해줬다. 천국이 있다는 거였다. 나는 천국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믿음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내 머릿 속이 문제였다. 믿으면 누구나 천국에 간다는데도 믿느냐는 질문에 답변을 하지 못했다. 그 뒤로 나는 여름성경학교를 갈 수 없었다. 그 이후로도 사후 세계에 대한 의문은 답을 찾지 못한 채 마음속에 묻어 두고 살다가 이 날 '죽음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두 발을 관 속에 넣고 누웠다. 뚜껑이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뚜껑이 거의 닫히려는 순간, 나는 진짜로 내가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아, 싫어, 싫어요!! 못하겠어요 ...." 나는 얼굴을 손에 묻고 울먹였다. 상반신만 세운 채 한참을 관 속에 앉아 있었다. 다시 한 번 해보려 맘을 다그쳤지만 머리가 저절로 절레절레 흔들렸다. 관이 닫히려는 순간 갑자기 눈 앞에 손을 길게 뻗고 목놓아 울고 계신 엄마 모습이 보였다. 숨이 턱 막혀왔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서 관 밖으로 나왔다. 내 뒤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 봤다. 그 날 참석한 수 백명 중에 실패한 사람은 나 혼자였다. '다들 잘 하는구만, 나만 왜 이리 호들갑일까.'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친구들은 괜찮다며 위로를 했지만 그 부끄러움이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 호주 전역을 여행하고 싶었으나 자금이 여의치 않았다. 그 대신 결혼 이후 가족과 함께 여행자의 한가로운 시선으로 시드니를 다시 찾았다. 공부하던 때보다 다양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공부하던 때의 노곤함이 싹 씻겨 내려갔다. 호주에 있는 동안 가장 잘한 일은 부모님을 호주로 초청한 것이었다. 교회 집사님들과 친구들이 라이드도 해줬고 식사에도 초대했고, 파티도 열어 줬다. 부모님은 나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기로 한 듯 아주 흐뭇해 하셨다. 부모님과 함께 오신 일행에 나도 끼어 시드니 여러 곳을 여행했다. 그 후로 군을 제대한 동생을 호주로 불렀다. 가족들의 해외 여행을 촉발시킨 이 경험은 그 뒤로도 뿌듯한 기억으로 남았다. 타국에서 2년여 간의 '행복한 고생'을 하고 돌아온 내게 친구들은 "네 얼굴이 많이 편해졌다. 밝게 잘 웃어서 좋다."고 했다. 사회 문제와 나를 구별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웃으며 행복해도 되는 존재라는 것을 체득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