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 복이 온다
아재 개그를 좋아한다. 개그맨처럼 전문적으로 웃기긴 어렵고 생활속 '적정' 유머를 구사한다. 뭐, 공연도 아니고 집에서 이 정도면 생활 속 웃음을 유발하기엔 부족하지 않다. 웃고 나면 금세 분위기가 밝아진다. 활기가 생기고, 고민도 사라진다. 웃길 의도가 없었으므로, 고민 없이 툭 뱉은 말로 상황을 순식간에 화기애애하게 만든다.
남편은 컴퓨터와 기계에 관심이 많다. 차나 노트북을 사야할 때면 한 달쯤 전부터 인터넷을 검색한다. 핸드폰 검색창이 열 개도 넘게 동시에 열려 있다. 내 핸드폰을 살 때도 결정이 무섭게 기종 비교에 몰두하는 남편과는 달리 당사자인 나는 관심이 없다. 나는 기계치다. 기계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지를 태생적이라 설명할 수밖에 없다. 내 핸드폰 액정이 깨졌을 때도 남편은 액정을 인터넷으로 직접 구입해서 공기 방울이 들어갈세라 조심조심 붙혔다. 고맙긴 하지만 나는 그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다. 움직임 없이 몇 십분, 몇 시간 물체와 씨름하는 일은 나로서는 참기 힘든 고역이다. 재미도 없을 뿐더러 지켜보자면 몸이 배배 꼬이기까지 한다.
책쓰기를 하려는 나에게 아이패드가 필요할거라고 남편은 판단했다. 눈도 점점 침침해지는데, 돌아다니며 글을 쓰고 보려면 휴대폰보다 조금 큰 화면이 필요할거라 했다. 혼자 진단하고 혼자 구입했다. 며칠 검색하는가 싶더니만 어느 날 아이패드가 도착했다. 사용할 사람은 나라고 말했지만, 막상 도착한 아이패드를 만지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닌 그다. 나는 누군가 사용법을 다 익혀서 알맹이만 알려주길 바란다. 이것이 우리 부부의 차이점이며, 둘 사이 웃음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사용하려는 나는 기계를 보지도 않고 도망다니고, 사용하지도 않을 그는 며칠 째 퇴근만 하면 그걸 사용중이다.
내가 최소 기능만을 익히고 조금씩 사용하는 것을 보더니 이젠 또 펜슬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낮에 소포가 왔다. 남편은 뭔지 열어보라고 했지만 나는 열어보지 않았다. 저녁에 집에 오니 하얗고 예쁜 아이폰 전용 펜슬이 있었다. 딸과 남편은 둘이 얼굴을 맞대고 펜대를 굴리고 있었다. "아, 여보 이리와봐. 이건 말이지 물 건너온 거라구." 해외 직구라고 했다. 나는 대답했다. "그건 나도 알쥐. 이건 물건 넣어온 거라구. 남편은 펜을 들고 말했고, 나는 상자를 들고 말했다. 그리곤 웃었다. 그 웃음은 내 고마움의 표현이다.
요즘 나는 나르시시즘(자기애성 인격장애)과 가스라이팅(gas lighting)에 몰두하여 자료를 찾고 있었다. 어떤 사람의 행동 패턴을 이해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가 어느 날 딱 맞는 용어를 찾았는데, 그게 '나르시시즘'과 '가스라이팅'이었다. 우울감을 달고 살던 내 친구에게 이 정보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열심히 발굴한 내용을 그 친구에게 보냈다. 친구는 평생 우울하고 자신 없고 힘들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틀을 찾아내니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문제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계기를 준 내게 평생 고마워할 거라고도 했다. 나르시시스트의 주요 특징은 '가스라이팅'이라고 불린다. 궁금증이 많은 주제라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료를 검색했다. 어느 날 딸과 함께 사람 성격의 스펙트럼이 무척 다양하다는 얘기를 주고 받았다. 마침 그날이 아파트 쓰레기 분리수거일이었다. 딸이 분리배출하러 1층에 같이 다녀오자고 했다. 분리배출을 마치고 집으로 올라오는데 현관문 옆에 가스 검침표가 보였다. "아참, 여기에다 가스 검침 숫자 기록해야지! 생각난 김에 지금 빨리 적어놔야겠다. 이런 걸 바로 바로 '가스라이팅(gas writing)'이라고 하는거야." 딸은 재밌다며 웃었다.
"어, 주말에 ㅇㅇ가 집에 오니까 과일이라도 좀 주문해야겠다. 과일 뭐로 주문할까?" 인터넷 쇼핑몰 창을 열어 놓고 큰 딸에게 물었다. "어어..귤이랑 오렌지 어때요? 까먹을 수 있는거로." 나는 화난듯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뭐, 까먹을 수 있는거? 아니, 기껏 먹으려고 사는 건데 왜 까먹어. 돈들여 산거 까먹지 말고 먹어야지." 이번엔 너무 썰렁했나? 평소 농담을 막지 않고 그저 웃어주니 좋은 줄 알고 계속 이런다.
어느 날 가족 생일을 맞아 맛있다는 식당엘 갔다. 남편은 귀찮은지 건물 지하 주차장 대신 건물 앞 길가에 주차했다. 나란히 줄을 맞추어 주차된 차가 많았다. 기분 좋게 식사를 했다. 건물 밖으로 나왔더니 차 앞유리창에 노란 딱지가 떡 하니 붙어있는 게 아닌가. 주차 안내 표시도 없었는데 속상했다. 나란히 주차된 모든 차량에도 노란 딱지가 앉아 있었다. 이미 발생한 일을 어쩌겠나. "에이, 오늘 밥값이 갑자기 올랐버렸네... 어쩐지 오늘 유난히 맛있다 했네." (웃음) 거기서 끝냈다. 더 곱씹어 봐야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유머라는게 실상 건질 내용은 없다. 하지만 유머가 지나간 자리엔 웃음과 분위기 전환이 생긴다. 수준 낮은 개그로도 머리를 속일 수 있고 논리를 잠재울 수 있다. 때론 인생의 갖가지 괴로움이 별거 아닌 것 같은 기분까지도 만들어준다. 아재 개그는 부정을 긍정으로 만드는 아주 돈안들고 쉬운 '적정' 유머다.
개그란 이렇게 글로 적는 것 보단, 현장에서 순식간에 치고 빠져야 하는 재치가 생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