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자나무 무늬가 있는 핑크색 셔츠를 옷걸이에서 꺼내 침대 머리맡에 올려놓는다. 바지는 청바지다. 신발은 당연히 하얀색 스니커즈다. 짧은 덧신에 신을 예정이다. 언제부터 생긴 건지 거울을 볼 때마다 검버섯처럼 기미가 조금씩 올라와서 그걸 가리는데도 한참의 노력이 필요하다. 레이벤 초록색 선글라스를 머리에 얹고 그 애를 만나러 간다. 콧노래가 신발끝에 달랑달랑 따라온다.
다른 누구를 만날 때 보다 이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내 심장에 바람이 한주먹씩 더 들어간다.34살의 나이차이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는, 정신적으로 우리는 오래된 친구이자 조력자이자 동반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 친구와의 만남은 내 생활의 활력이다.
이 친구를 만난 건 15년 전, 그러니까 내가 쉰여덟,그 친구가 24살 때쯤 내 연극 공연의 관객으로 와서 기념사진을 같이 찍어주고, 후에 우연히 소극장 근처 밥집에서 만나 합석하면서 친분이생겼다.
사회초년생이었던 그 애는 물론 남자 친구도 있었고, 또 그 남자 친구를 종종 내게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 애와 나는 그렇게 두세 달에 한 번씩 안부를 묻고 가볍게 점심을 먹거나 공연을 보는 사이였다. 그 아이는 내게 딸처럼 살갑게 굴었다. 아들밖에 없는 내게 그 당시 이 친구는 내게 딸이자 친구이자, 열혈팬이었다.
그러다 2~3년쯤 지난 어느 날, 그날은 그 아이가 남자 친구랑 헤어졌다고 술을 진탕 먹은 날이었다. 근처에 있던 내가 데리러 갔던 날,
그 애와 난 섹스를 했다. 그냥 사고였다. 호텔 방에 눕혀두고 오려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애가 나를 원했고, 그날따라내가 그 아이의 손을 놓지 못했다. 그 아이의 핑크색 젖무덤은 내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어린 그 애는 그날 나를 헤어진 애인으로 생각했던 것도 같다. 술에 많이 취한상태였으니.
그 후 그 아이와 나는 예전처럼 달라질 거 없이, 아니 약간 소원해져서 서너 달에 한 번씩 안부를 묻곤 했다. 남자 친구가 있는 시기에는 대여섯 달, 없는 시기에는 그보다 자주,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옆에 누가 없을 때는 같이 여행도 다녔다. 그냥 보험 같은 관계였다. 외로울 때 든든히 지켜주는 섹스를 나누는 친구사이.
사랑이나 미래를 도모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선생님과 제자 같은 관계였다. 아버지가 안 계시는 이 친구는 나를 무척이나따랐다. 예의를 지켰다고 해야 할까. 나이대접을 해줬다고 해야 할까. 단 한 번도 내 의견에 No를 한 적이 없었고 언제나 내가 하자는 대로 나를 편하게 따라주었다.아마 그래서 불편할 거 없는 관계였던 것 같다.
그 앨 내가 통째로 가질 수는 없었지만 가끔 만날 때만큼은 내게 순종했고, 나에게 젊음의 활력을 주는 친구였다. 내 많은 걸 아낌없이 주고 싶은 아이였다. 내가 만나던 어느 노련한 여자들보다어리숙하고 서툴렀지만 그게 또 좋아 품에 안을 때마다 내 어디선가 에너지가 솟아나곤 했다.나는 그 친구를 만날 때마다 조금씩 젊어져 갔다.
내가 여행지를 계획하고 호텔방으로 그 아이를 들이는 날 조차도 이 친구는 가벼운 마음으로 나를 만났고 내 품에 안겼다.
들릴락 말락 하는 그 애의 신음소리도 좋았다. 아마 또래 남자들과는 앙큼한 고양이 소리를 냈을 그녀는 내 앞에서는 유난히 입을틀어막았다.
언젠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 내가 파묻혀 있을 때,
내 머리카락을그녀가 귀여운두 손으로 움켜쥐었던 적이 있다. 나는 그날 이 친구의 포로가 되었고 처음이자 마지막 그녀의 진심을맛보았던 날이다.
그렇게 그 아인 내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그렇게 사지가 묶여 조용히 파닥파닥 거리며 15년을보냈다.
세월은 꽤 빨리 지나간다. 나이 들수록 1년이 새로 시작됐네, 의식하고 익숙해질 때쯤이면 벌써 한해의 끝을 달린다.
나의 그 아이는 이제 나에겐 39살의 그녀가 되었고, 작은 카페를 차리고 또 사랑하는 애인과의 달콤한 미래를 꿈꾸는 듯했다. 하지만 늘 사랑에 서툴러 결혼까지는 가지 못한 채 자주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었지만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며 점점 그녀는 조바심을 느끼는 듯했다.
"아이를 가졌어요. 4주 됐어요. 선생님 아이예요"
"뭐라고? 어쩌다가, 아 젠장"
"낳고 싶어요"
"무슨 소리야,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제정신이야!"
"선생님께 아빠 노릇 하라는 거 아니에요"
"아, 그러니까 4주 됐으면 내가 병원 알아볼게.유산시켜. 알려지면 서로에게 망신이야!"
그녀와 만나는 동안 한 번도 이렇게 언성을 높이며 싸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뜻을 꺽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눈빛에서 느껴졌다.이제는 안정을 찾고 싶은 것 같았다.
우리의 비밀스러운 15년의 관계는 이렇게 갑자기 무너진 씽크홀처럼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조바심이 부른무모한 용기가 초능력이 되어세상에 까발려졌다.
여자를 망친 파렴치한으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처음 그 아이와 섹스했던 날을 떠올린다.
그날 내가 너를 호텔방에 놔두고 그냥 나왔다면 지금껏 너를 15년 동안 내 옆에 둘 수 있었을까.
나는 공평하게 두 아들과 새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 재산 분할을 3등분으로 할 예정이다. 적당한 운동과 건강식도 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