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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jury time Aug 07. 2021

인생 참, 오소독소 하지

잘못된만남

"오늘은 너로 하자"


야자나무 무늬가 있는 핑크색 셔츠를 옷걸이에서 꺼내 침대 머리맡에 올려놓는다. 바지는 청바지다. 신발은 당연히 하얀색 스니커즈다. 짧은 덧신에 신을 예정이다. 언제부터 생긴 건지 거울을 볼 때마다 검버섯처럼 기미가 조금씩 올라와서 그걸 가리는데도 한참의 노력이 필요하다. 레이벤 초록색 선글라스를 머리에 얹고 그 애를 만나러 간다. 콧노래가 신발끝에 달랑달랑 따라온다.


다른 누구를 만날 때 보다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내 심장에 바람이 한주먹씩 들어간다. 34살의 나이 차이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는, 정신적으로 우리는 오래된 친구이자 조력자이자 동반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 친구와의 만남은 내 생활의 활력이다.


이 친구를 만난 건 15년 전, 그러니까 내가 쉰여덟, 친구가 24살 때쯤 내 연극 공연의 관객으로 와서 기념사진을 같이 찍어주고, 후에 우연히 소극장 근처 밥집에서 만나 합석하면서 친분이 생겼다.


사회초년생이었던 그 애는 물론 남자 친구도 있었고, 그 남자 친구를 종종 내게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 애와 나는 그렇게 두세 달에 한 번씩 안부를 묻고 가볍게 점심을 먹거나 공연을 보는 사이였다. 그 아이는 내게 딸처럼 살갑게 굴었다. 아들밖에 없는 내게 그 당시 이 친구는 내게 딸이자 친구이자, 열혈팬이었다.


그러다 2~3년쯤 지난 어느 날, 그날은 그 아이가 남자 친구랑 헤어졌다고 술을 진탕 먹은 날이었다. 근처에 있던 내가 데리러 갔던 날,


그 애와 난 섹스를 했다. 그냥 사고였다. 호텔 방에 눕혀두고 오려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애가 나를 원했고, 그날따라 내가 그 아이의 손을 놓지 못했다. 그 아이의 핑크색 젖무덤은 내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어린 그 애는 그날  나를 헤어진 애인으로 생각했던 것도 같다. 술에 많이 취한 태였으니.


그 후 그 아이와 나는 예전처럼 달라질 거 없이, 아니 약간 소원해져서  서너 달에 한 번씩 안부를 묻곤 했다. 남자 친구가 있는 시기에는 대여섯 달, 없는 시기에는 그보다 자주,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옆에 누가 없을 때는 같이 여행도 다녔다. 그냥 보험 같은 관계였다. 외로울 때 든든히 지켜주는 섹스를 나누는 친구사이.


사랑이나 미래를 도모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선생님과 제자 같은 관계였다. 아버지가 안 계시는 이 친구는 나를 무척이나 따랐다. 예의를 지켰다고 해야 할까. 나이대접을 해줬다고 해야 할까. 단 한 번도 내 의견에 No를 한 적이 없었고 언제나 내가 하자는 대로 나를 편하게 따라주었다. 아마 그래서 불편할 거 없는 관계였던 것 같다.


 내가 통째로 가질 수는 없었지만 가끔 만날 때만큼은 내게 순종했고, 나에게 젊음의 활력을 주는 친구였다.  많은 걸 아낌없이 주고 싶은 아이였다. 내가 만나던 어느 노련한 여자들보다 어리숙하고 서툴렀지만 그게 좋아 품에 안을 때마다 내 어디선가 에너지가 솟아나곤 했다. 나는 그 친구를 만날 때마다 조금씩 젊어져 갔다.


내가 여행지를 계획하고 호텔방으로 그 아이를 들이는 날 조차도 이 친구는 가벼운 마음으로 나를 만났고 내 품에 안겼다.

들릴락 말락 하는 그 애의 신음소리도  좋았다. 아마 또래 남자들과는 앙큼한 고양이 소리를 냈을 그녀는 내 앞에서는 유난히 입을 틀어막았다.

언젠가 그녀의 다리 사이에 내가 파묻혀 있을 때,

내 머리카락을 그녀가 귀여운 두 손으로 움켜쥐었던 적이 있다. 나는 그날 이 친구의 포로가 되었고 처음이자 마지막 그녀의 진심을 보았던 날이다.


그렇게 그 아인 내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처럼 그렇게 사지가 묶여 조용히 파닥파닥 거리며 15년을 보냈다.

세월은 꽤 빨리 지나간다. 나이 들수록 1년이 새로 시작됐네, 의식하고 익숙해질 때쯤이면 벌써 한해의 끝을 달린다.


나의 그 아이는 이제 나에겐  39살의 그녀가 되었고, 작은 카페를 차리고 또 사랑하는 애인과의  달콤한 미래를 꿈꾸는 듯했다. 하지만 늘 사랑에 서툴러 결혼까지는 가지 못한 채 자주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었지만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며 점점 그녀는 조바심을 느끼는 듯했다.


"아이를 가졌어요. 4주 됐어요. 선생님 아이예요"

"뭐라고? 어쩌다가, 아 젠장"

"낳고 싶어요"

"무슨 소리야, 내 나이가 몇 살인데! 제정신이야!"

"선생님께 아빠 노릇 하라는 거 아니에요"

"아, 그러니까 4주 됐으면 내가 병원  알아볼게. 유산시켜. 알려지면 서로에게 망신이야!"


그녀와 만나는 동안 한 번도 이렇게 언성을 높이며 싸운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뜻을 꺽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눈빛에서 느껴졌다. 이제는 안정을 찾고 싶은 것 같았다.


우리의 비밀스러운 15년의 관계는 이렇게 갑자기 무너진 씽크홀처럼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조바심이 부른 무모한 용기가 초능력이 되어 세상에 까발려졌다.

여자를 망친 파렴치한으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처음 그 아이와 섹스했던 날을 떠올린다.



그날 내가 너를 호텔방에 놔두고 그냥 나왔다면 지금껏 너를 15년 동안
내 옆에 둘 수 있었을까.


나는 공평하게 두 아들과 새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 재산 분할을 3등분으로 할 예정이다. 적당한 운동과 건강식도 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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