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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jury time Aug 03. 2021

황학동 중고 시장과 융단 주머니


https://brunch.co.kr/@futurewave/1219


공대생의 심야서재 님의 작품에 제가 숟가락을 얹어 연작을 해보았습니다. 연작 허락해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음에 들면 가격을 지불하고 가져가시오"


황학동 무인판매대에는 쓸모없어진 물건들이 쌓여있다. 대부분 버리기에는 아깝고 집에 두기에는 불편한 것들이다. 아마 날 잡고 집안 정리를 한다며 100리터짜리 검은색 비닐봉지에 일괄적으로 처박힌 분리수거도 안 되는 것들일 것이다. 남의 집 앞에 슬쩍 버려둔 그 검은색 봉투는 어느새 사라져도 아무도 눈치채치 못할 정도로 존재감 없는 것들이다.


아무리 두드려도 서너 개는 소리가 없는 실로폰과 입이 닿는 부분에 까만 침 때가 묻은 리코더 2개,  두부 반모만 한 지독하게 딱딱한 손때 묻은 지우개, 조개껍데기로 만들어진 시간이 맞지 않은  벽걸이 괘종시계, 금박으로 씌워진 이집트 피라미드 모형 저금통, 작은 융단 주머니 안의 초록 구슬 세 개, 컴퓨터 옆에 놓였었을법한 가로세로 3*4 센티미터 작은 액자, 돌돌 말린 벽걸이 그림, 그리고 갸름한 얼굴에 네모 뿔테 안경을 쓴 귀여운 남자 캐릭터 인형, 그리고 그 인형 옆에 작은 침낭까지 들어있는 투박한 여행용 배낭.

남자캐릭터 인형

무인판매대의 물건들은 아무렇게나 놓여있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싸여있지 않다. 매시간 누군가가 와서 호기심에 꼼지락거리며 만지고 간 물건들을 다시 재자리에 정리해 놓은 듯 그렇게 일관된 패턴으로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다.


새로 이사한 집에 가져다 놓을 물건들을 좀 건질 겸 들렀던 황학동에서 이 무인판매대는 주머니가 가벼운 나에게는 파고들고 싶은 호기심 넘치는 상점이었다. 나는 밀려오는 인파들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무인판매대의 물건들을 하나씩 뒤집어보며 살펴본다. 그리고 아직은 낯선 집안 구조를 되짚생각하며 물건 세 개를 옆구리에 끼고 가격을 지불했다. 이곳의 물건은 무조건 5천 원이다. 어떤 것은 비교적 저렴한 것 같고, 어떤 것은 터무니없이 비싼 것 같지만 이미 벌써 마음을 빼앗긴 터라 놓칠 수 없는 아이템이다. 내가 집은 물건은 조개껍데기로 만든 벽시계, 벽걸이 그림, 그리고 남자 캐릭터 인형이다. 돈을 지불하려고 주머니를 뒤지는데 만 원짜리 두 개가 나온다. 박카스 상자에 돈을 넣고 잔돈을 찾으려고 뒤적이는데 누군가가 내 손목을 덥석 잡는다.


"앗 깜짝이야"

"여기 있습니다. 5천 원"


남자가 5천 원을 건네며 동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온몸에 진흙같은 흙이 여기저기 묻어 몸을 움직일때마다 흙먼지를 떨어뜨린다.

그리고는 내가 집은 물건을 훑어보더니 융단 주머니를 챙겨서 검은 비닐봉지에 넣어준다.


"이것도 가져가슈"


떠넘기듯 물건들을 봉지에 쑤셔 넣는 그를 피해 얼른 시장을 빠져나왔다. 거스름돈 5천원에도 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어쩐지 안 좋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사람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사 가지고 온 물건들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마법사의 마법도구처럼 살펴본다. 조개껍데기로 만든 벽시계는 거실에 걸어놓으려고 산 것인데 시간만 제대로 맞추면 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또 하나, 돌돌 말린 벽걸이 그림. 안방 문 바로 옆 벽지가 뜯겨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벽체를 가리기 위해 사 왔다. 이 벽걸이는 달마도가 수놓아져 있고, 달마도는 집에 걸어놓으면 운이 좋다고들 한다. 빚쟁이들에게 쫓겨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서울 바닥에 도대체 이렇게 굽이굽이 좁은 골목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외딴 집이 있고, 또 전기세만 내고 살고 싶을 때까지 살라던 아는 선배의 배려는 이제와서는 내게 엿을 먹이는 건지, 선심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선배의 낡은 집은 거실 겸 부엌과 방하나가 전부였고 나머지는 온통 잡풀로 덮인 마당이었다. 심지어 화장실까지 마당 한켠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여자인 내가 혼자 이 집에 살기는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많았다.


집에 도착해서 벽걸이 달마도를 걸고 괜한 안심을 가슴에 새기며 마당을 한번 둘러보았다.

마당에는 뜻밖의 우물이 있었다. 깊이를 가늠하기 위해 돌멩이를 하나 던져보았다. 한참을 허공 위에서 맴도는가 싶더니 '척'하고 떨어진다. 분명 물은 아니고 진흙바닥에 떨어진 걸 직감한다. 돌멩이가 떨어지며 나는 소리가 물을 타고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웬일인지 아까 만난 황학동 남자의 동굴같은 소리였다.


마당을 대충 살펴보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배가 고파 휴대용 버너에 불을 켜고 미리 사다 놓은 신라면을 꺼내 끓였다.

그리고 티브이를 켰다. 리모컨이 작동을 안 하는 건지 채널이 돌아가지 않고 계속 재미없는 한국영화만 진행되고 있었다. 단편영화인지 듣보잡 배우들이 웅성웅성 대사처리를 했다. 집안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면 웬일인지 불안해지는 루틴으로 하는 수없이 알 수 없는 영화를 켜놓은 채 라면을 먹는다.


웬일인지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휘감아 척척 달라붙는다. 낡아서 물 빠진 흰색인지, 회색인지, 살구색인지 색상이 불분명한 원피스도 거추장스럽게 등짝에 휘감긴다. 머리고무줄을 좀 찾으려고 해도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 머리카락을 대충 어깨 앞으로 가지런히 모아놓고 남은 면발을 후루룩 넘기고 있을 때였다.


티브이에 나오는 남자 배우가 렌턴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방안을 살핀다. 언뜻언뜻 렌턴 불빛에 보이는 배우의 얼굴이 낯익다. 아까 사 온 남자 캐릭터 인형과 닮았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갸름한 남자 인형. 내가 이 인형을 산 이유는 이곳 낯선 집에서 그나마 정을 붙이려고 산 인형이었다. 빚쟁이에게 쫓기면서 주위에 있던 남자 친구들은 하나같이 나를 존재감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내가 그들에게 더이상 필요하지 않았는지, 자신들에게 빌붙을까 봐 그런지 모조리 모르는 척 떠나갔다. 이젠 누구 하나 나를 찾지 않는다. 

인형이 나름 귀여워서 데려왔는데 어쩜 신기하게 티브이에 비슷한 캐릭터의 남자가 등장했다. 라면발을 대롱대롱 매단 채 우울한 생각을 접고 영화에 빠져들었다.


남자 배우는 어두운 곳에서 뒤척이며 이부자리를 살피고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내 든다. 나도 모르게 그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봤다.

갑자기  그 남자 배우가 고개를 들더니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다. 그때,  나랑 눈이 마주친 것도 같다. 남자 배우는 깜짝 놀란 사람처럼 자지러지게 소리치더니 뒷걸음질 치고 이내 화면이 까맣게 변해버렸다.

나도 모르게 같이 놀라 소파 등받이로 숨는다.


그때 벽시계에서 댕댕댕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티브이도 꺼져버리고 다시 지지도 않았다.


"이놈의 집구석, 못살겠다. 당장 내일 고시텔이라도 들어가야지"


혼잣말을 하며 이부자리를 살피고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했는지 금세 곯아떨어졌다.

한참 꿈속을 헤매고 있는데 어디선가 사각사각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사각거리는지 잠이 쏟아지는데도 눈꺼풀이 떠졌다. 핸드폰을 열어 구석을 비추었다. 구석에 누군가의 넓은 등이 보였다. 한복 저고리 같은 길고 넓은 옷을 어깨에 휘감아 걸친 사람이 넓은 등을 들썩이며 무언가를 주워 먹고 있다.

잠결이었지만 등골이 오싹했다. 나는 놀라서 들고있던 핸드폰을 침대 구석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손전등이 켜진 핸드폰이 허공을 비추며 흔들린다. 아무리 더듬더듬 핸드폰을 집으려고 해도 어디까지 떨어졌는지 잡히지가 않는다.

구석의 알 수 없는 존재는 내가 옆에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핸드폰 불빛이 방안을 맴도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언가를 계속 사각사각 주워 먹는다.


나는 옆에 잡히는 데로 그것을 향해 집어던졌다. 하지만 너무 가벼운 영수증, 나무젓가락 껍질 같은 것들이라 그것에 닿지 않는다. 그때 손에 잡히는 융단 주머니, 아까 황학동 남자가 덤으로 준 융단 주머니의 구슬이 잡혔다. 나는 주머니에서 초록 구슬 하나를 힘껏 던졌다.

너무 새게 던져서 맞은편 벽에 맞고 다시 내게로 튕겨져 와서 데구루루 멀리 굴러갔다. 또 하나의 구슬을 꺼내 힘껏 던졌다. 이번에는 그것의 옷깃 속으로 구슬이 들어가 박혀버렸다. 마지막 남은 구슬을 정확히 그것의 등을 향해 던졌다.

이번에는 명중이다. 알 수 없는 존재는 일순간 사각사각 먹던 일을 멈추고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내가 걸어놓은 달마도의 달마 선생이다. 선생은 벽시계의 조개껍데기를 하나하나 뜯어서 사각사각 씹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 얼어붙은 나를 두고, 핸드폰의 불빛은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점점 사그라들었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을 때, 그 집에서는 그 누구도 머물지 않았던 것처럼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갔다. 어젯밤 라면을 끓이고 달마도를 걸어놨던 여인도 귀여운 캐릭터 인형도 모두 사라졌다. 외딴집은 다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마치 다음 사냥감을 기다리듯. 그 외딴집은 쓸모없고 존재감 없는 것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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