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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Aug 02. 2021

황학동 중고 시장과 낡은 스케치북

단편 소설

  황학동 중고 시장에 들렀다.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그곳에 들른 건 아니었다. 단지 토요일이었고 아침부터 꽤 무료했다는 것, 게다가 너무 더웠다는 게 이유였다. 게다가 가끔은 생각을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생각은 거추장스러운 편이 아닌가. 그런 귀찮은 것들을 훌훌 버리고 시장이라는 속성 안쪽으로 거세게 밀려들고 싶은 것이었다. 시장이라는 곳은 그런 곳이 아닌가. 불결하고 시끄럽고 정돈되지 않은 것들이 가득 찬 곳. 그래서 인간의 본연으로 돌아가 살아남은 것들을 만날 수 있는 곳.


  지나치게 낡아버린 누군가 쓰다가 버릴 법한 물건들이 그곳엔 가득했다. 그런 물건도 한때 누군가에겐 유용했으리라. 지금은 쓰레기라는 이름이 어울리겠지만. 아무튼 골목과 골목 사이를 오고 가다 한 가게에 시선이 고정됐다. 그곳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주인조차 없었다. 낡은 갱지에 이런 글자들만 주인을 대신할 뿐이었다.


  "마음에 들면 가격을 지불하고 가져가시오"


  참으로 불편하며 불친절한 문장이었다. 마음에 들면 가격을 지불하고 직접 챙겨가라니. 하지만 그 말 때문이었을까. 거기에 속한 물건들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하는 듯했다. 실용적인 면에서는 하나도 쓸모가 없었지만. 


  베타 방식의 비디오 플레이어, 두 개의 스피커와 기다란 안테나가 달린 스테레오 카세트 플레이어, 1970이라는 숫자가 찍힌 이름 모를 만년필, 색깔이 누렇게 바랜 쓰다만 작은 노트, 손바닥보다 작은 도자기로 만든 말 모양의 촛대, 그리고 만지면 부스러질 것 같은 낡은 책 몇 권. 뭐 내 눈앞에 보이는 물건들은 보통 그런 것들이었다. 대체 쓰레기 소각장에서 살 처분을 받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그래, 어쩌면 황학동 중고 시장에도 무인 판매가 성행 중일지도 모르리라. 인간의 역할은 여기저기에서 쓸모가 없어지고 있다. 기계나 인공지능이 인간의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고 예견하는 것도 인지 오류가 아닌가. 이렇게 낡은 갱지도 인간의 메신저 역할, 어떤 중재자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해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인간은 사라져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낡은 것들에게 먹혀서.


   먼지가 가득 내려앉은, 아마도 저 물건에 손을 대는 사람은 내가 최초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1970이라는 숫자가 찍힌 만년필과 스케치북 그리고 손바닥보다 작은 노트 이렇게 세 가지를 구매하기로 했다. 물건 가격을 속으로 암산하고 합계인 17,000원을 에누리도 하지 못한 채, 박카스 박스에 넣었다. 나는 만 원짜리 두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박스 안을 뒤적거려가며 천 원짜리 두 장과 백 원짜리 동전 10개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물건을 들고 나는 곧바로 시장을 떠났다.




  시장을 떠나 나는 양양으로 떠나는 버스 안에 앉아있다. 지금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고 버스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지만 기사는 에어컨을 최대치로 가동하고 있다. 오전에는 더위와 북적거림 때문에 고생했고 밤에는 추위 때문에 고생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사라지고 있다.


  버스는 4시간 가까이를 달려 양양 터미널에 도착했다. 선배가 알려준 펜션으로 이제 이동만 하면 된다. 하지만 새벽 2시에는 선택지가 거의 없다. 펜션은 게다가 현재 비어있다. 코로나 이후로 선배는 영업을 중단하고 그곳을 방치해놓았다. 마침 불 켜놓은 택시가 한 두대 보였다. 목적지를 이야기하자 택시 기사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말없이 미터기를 찍고 목적지로 이동했다. 


  펜션에 도착했다. 밤이라서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펜션이라기보다는 낡은 주택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법한 집이 한 채 나타났다. 나는 속으로 선배가 이런 식으로 펜션을 운영했으니 장사가 안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뭐 지금 그런 거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 


  기분이 나빴단 것은 집 주변의 불길한 경치 때문이었다. 낡은 독채 하나와 아무도 사용하지 않을 것 같은 우물, 그리고 창고로 보이는 썩은 자재가 가득한 공간, 게다가 밤이어도 음산한 기운을 내는 비석 두 개와 잡초가 가득한 묘지. 왜 선배는 이런 곳에 펜션을 꾸미려고 한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침 휴가를 맞아서 며칠간 무의 도식하고 싶었다. 선배가 운영하던 펜션이 그때 생각났다. 선배는 전기세 정도만 부담하는 선에서 내가 원할 때까지 그곳에서의 거주를 허락했다. 나는 지겨워질 때까지 그곳에 머물겠다는 대답만 하고 바로 이곳을 찾았다. 


  가방에서 열쇠를 꺼냈다. 자물쇠에 열쇠를 끼우니 처억, 하고 오래된 녹슨 물건이 붙어 있다 떨어지는 그런 낡은 소리를 냈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자 안쪽에서 찌든 곰팡내가 밀려왔다. 오른쪽 벽 스위치를 눌렀으나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런 낭패가 있나, 나도 모르게 짜증 섞인 말을 집안에 토해내곤 가만히 서 있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할 때까지...


  가방에서 캠핑용 랜턴을 꺼냈다. 거실 스위치가 작동하지 않는 걸 보니 아마도 전등이 나간 듯했다. 내일 날이 밝으면 읍내에 나가서 교체할 전구 같은 것들과 그 밖의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은 대충 정리하고 잠을 자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야 내일을 또 무사하게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까지는 이 캠핑용 랜턴으로 대충 버티면 그만이었다. 빛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물론 지금은 없는 게 다소 아쉽긴 하지만.


   랜턴을 천정에 대충 걸쳐 놓았다. 그렇게 두었더니 제법 집안 곳곳까지 빛이 스며들었다. 거실 소파에 대충 잘 자리를 잡아 놓는 게 좋을 듯싶어서 일단 방에 들어가 이불을 꺼내오기로 했다. 미닫이로 큰 방의 문을 밀었다. 빡빡하니 잘 열리질 않았다. 대체 이 집에선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어쩌면 내일 다른 장소를 섭외하는 게 좋을지도.


  이불이 없어도 자는 데 딱히 무리는 없어 보였다. 배낭에서 침낭을 꺼내놓고 대충 소파에 펼쳐놓았다. 베개에 공기를 밀어 넣어 두툼하게 만들었다. 침낭 속에 몸을 구겨놓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나는 왜 이런 곳에 왔을까. 오전의 황학동과 중고 시장, 주인 없는 가게, 선배가 운영하다 만 낡고 기괴한 펜션, 그리고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의 나. 모든 것이 기묘했고 뒤틀려 있었다.


  잠을 자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떠도 계속 펜션 주위에서 어떤 존재가 위험한 일을 도모하는 듯했다. 그러니 절대 잠을 자서는 안된다. 자게 되면 내가 모르는 일들이 바깥쪽에서 안쪽까지 벌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불길한 생각이 들자 자는 걸 관둬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때, 오전에 구매한 컬러링 스케치북이 생각났다. 대충 그것을 펼쳐놓고 따라 그리다 보면 시간이 흘러 새벽이 다가오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산골에서는 비교적 해가 늦게 뜨는 편이긴 하지만, 3시간에서 4시간 정도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스케치북을 넘기자마자 경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곳에 미리 스케치된 그림은 바로 내가 머물고 있는 선배의 펜션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곳! 설마, 그렇지 않을 거야. 세상에 비슷한 장소가 얼마나 많은가,라고 생각했지만 그곳은 영락없이 내가 지금 도착한 그 펜션이었다. 


  낡은 단톡 펜션 한 채, 뒷산의 묘지 두 개, 낡은 창고와, 버려진 우물, 모든 현장이 그림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밑바탕에 그대로 그림을 그리려다 갑자기 다음 장이 궁금해졌다. 설마 저 우물 속에서 뭔가 튀어나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장으로 넘길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했다.


  하지만 어떤 일련적인 사건들은 내가 선택하건 그렇지 않건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됐다. 그러니 차라리 궁금증을 해결하는 게 더 맞겠다 싶었다. 다음 장으로 넘기자 이번에는 우물 옆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 여자는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색상이 불분명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이전의 그림과 다른 것은 오직 그 여자의 출현이었다. 나는 그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앞모습이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입가에서 피라도 흘린다면 이 심야의 공포를 더 극대화시켜줬을 테니까.


  나는 곧바로 다음장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그 여자가 걸어서 내쪽 그러니까 집 쪽으로 이동했다. 이제 우물과 이 집 사이에는 중간쯤만 남은 셈이었다.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저 여자는 분명 문 앞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리고 문고리를 돌릴 것이다. 그렇지만 다행이었다. 나는 조심스러운 인간에 속한다. 아까 들어올 때 문을 걸어 잠가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만약,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라면 문 따위든 벽 따위든 아무론 소용이 없을 터였다. 그저 문이든 벽이든 뚫고 들어오면 그만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자, 공포가 현실이 됐다. 저너머의 어두운 공포, 영화에서 보던 나와는 거리가 먼, 그런 희박한 존재가 아닌 현실감과 입체감을 지닌 존재.


  숨 막히듯 다음장으로 전개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여자의 앞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가냘프고 처량한 뒷모습만 쓸쓸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문을 다행히 열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런 것 같았다. 아마도 현실의 어떤 에너지가 작용했나 보다. 그런데 아뿔싸, 거실 창을 열어둔 것이 기억이 났다. 빌어먹을 왜 그 창을 열어두었을까. 아마도 내 예측이 맞다면 다음장에서 그녀는 거실 창쪽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역시 내 예상대로 그녀는 거실 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시선이 급격하게 전환됐다. 지금까지 앞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그녀가 정면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앞모습이 지워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스케치의 밑바탕도 아닌 그냥 하얀 백지상태의 그녀였다. 하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어떤 엄숙한 표정과 무표정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 소리는 어쩌면 이명일 지도 가위눌렸을 때 나타나는 비명 같기도 했다.


  다음 그림은 예상하지 않아도 됐다. 그녀는 역시 내가 웅크린 침낭 속에 드러누워 있었다. 나와 나란하게 그리고 평행하게 마주 본 채, 어떤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부부처럼 다정하게 누워있었다. 물론 나는 그 광경까지는 예측하지 못했으므로 소름이 끼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결국 까무러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을 때, 그 펜션에는 그 누구도 다녀가지 않은 것처럼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갔다. 어제 도착한 사내도 그가 가진 스케치북도 배낭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펜션은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마치 다음 사냥감을 기다리듯. 그 펜션은 인간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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