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해프닝.

<깊이에의 강요>를 읽고

by injury time



- 달동네 공동 세면장에서-

겨울이 오고 있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쏟아져 나오는 입김을 보면.
수도꼭지를 아무리 비틀어 보아도 애기 오줌줄기처럼 질질 흐를 뿐인 물줄기에 칫솔을 적시고,
힘없이 쭈그리고 앉아 밑동이 반쯤 찢어진 치약을 칫솔로 훑어서 담배에 찌든 이빨을 문질러 본다.
좆나 개 같은 박사장의 술잔을 끝내 다 받아 퍼마신 덕에 아직도 푸석푸석한 방년 스무두 살의 누나.
겨울이 다 되기 전에 물 콸콸 나오는 곳으로 이사 가자는 투정에
오늘도 누나는 넘치는 술잔을 기울인다.
거미줄이 얼기설기 너저분한 세면장 한 켠엔
누나의 기스 난 스타킹 속의 비누조각이 힘없이 엎드려 있다.


얼마전에 소설 구상하면서 오래된 파일철에 스무살 대학 1학년 때 썼던 시가 하나 나왔다. 첫 시창작 시간에 레포트로 제출한 시였고, 아마 이 시가 내 첫 시창작품이었을 것이다. 뭔가 멋져보이려고 그럴싸하게 상상의 나래를 막막 펴서 한편의 소설같은, 옛날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시를 써서 냈는데 의외로 학생들의 호평을 들었다. 생생한 표현력과 누나와 동생의 애환이 담긴 시로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이후로 시를 쓰지 않고 있다. 시는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작가가 무의식 중에 쓴 말도 그럴싸하게 포장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창작에 진정성(?)을 못느꼈다.


며칠전, 진심 부럽고 존경하는 작가님이 아주 어려운 댓글을 달아주셨다.

소설은 컨텐츠가 되면 안되고,
그안에서 이야기만 꺼내려면
깨져버리는 도자기여야 한다는 말을 어제 어디서 읽었어요.
문체랑 내용의 결합이 단단해서
탱글탱들하니 맛있어요!

매번 이분에게 열등의식이 있던 참이었다. 나보다 젊었고, 예쁠 것이고, 비혼이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나보다 더 친하고, 글을 참 잘 쓰는 그녀에게 열등의식, 아니 경쟁의식이 있던 참이었다.


내가 모르는 컨텐츠에, 도자기 얘기까지...답글을 달아줘야 하는데 내용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감사합니다'할 수도 없고, 저 문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한심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우선 초록창에 첫 줄을 검색창에 옮겨 적었다. 건질 게 없었다. '깨져버리는 도자기'를 검색했다. 도자기공방이 나왔다ㅠㅠ


하는 수 없이 문장을 해석할 만한 친구들에게 톡을 하나하나 보냈다. 모두 해석 불가 판정을 받았다.

급기야 몇 년 동안 연락 안 하고 지낸 책 많이 읽기로 소문난 친구에게 연락을 하고 안부 같은 건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이 내용을 보내주며 해석해보라고 했다. 구구절절하게 내가 브런치 작가고 소설을 쓰는데.. 어쩌고 저쩌고..

친구는 앞뒤 사정도 모르고 '관념을 깨뜨리는 소설을 쓰라'는 뜻 같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뭔가 찝찝했다. 그분이 그런 댓을 달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와 난 그동안 꽤 소통이 된 사이였다.


드디어 여러 친구들의 머리를 모아 결론적인 답글을 완성했다

도자긴 깨져야 맛이죠? 더 열심히 깨보겠습니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당당하고 시크하고 그러면서 쿨한 멘트. 친구들은 내게 절대 젊은 작가한테 지지 말라는 응원을 덧붙였다. 갑자기 늙어가는, 결혼한 여자들의 동지애가 들끓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저 댓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결국 저녁이 되어서야 나다운 답글을 달았다.

작가님이 댓글 단지 7시간 지났어요. 전 오늘 하루 종일 저 4줄을 해석하느라 말라 죽을뻔했어요. <깊이에의강요>가 생각났습니다. 여주가 비평가의 말한마디에 고뇌하다 자살한다는ㅠ 저는 그냥 씁니다. 도자기를 깨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컨텐츠로 만들어서 독자를 혹하게 할 자신도 없어요ㅠ 그냥 자판에 손 올리면 써지고 제가 만든 세계가 펼쳐져요. 그냥 돌직구 날립니다ㅠ 뭔 말인지 모르겠고 제글은 그냥 맛나게 읽으시면 되겟습니다.ㅎㅎㅎ 이제 밥먹을수있어졌어욧!!!


<깊이에의 강요>는 <향수>, <좀머씨 이야기>, <콘트라베이스> 등을 쓴 파트리트 쥐스킨트의 작품이다. 단편 3개와 에세이 한 개로 이루어진 책이고 그전 책들만큼 아주 가볍고 짧아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짧지만 독창적이다. <깊이에의 강요>도 7페이지밖에 안된다. 게다가 손바닥만한 책이다. 전도 유명한 여류 화가가 어느 날 어느 평론가가 악의적인 의도 없고 창작을 북돋아줄 생각에 이런 평을 남기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여류 화가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점저 '깊이'에 대한 사유에 빠졌고, 물통 안에서 붓을 꺼낼 자신감마저 잃고 술과 함께 폐인으로 살다가 얼마 후 결국 자살을 한다는 내용이다.


창작이란 작가의 감각으로 이루어지는 예술작품이다. 좋고 나쁘고를 잣대로 잴 수도 없고 보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게 다 다르다고 생각한다. 비평가의 말 한마디, 독자의 댓글 한마디에 좌지우지하면서 흔들리고 하루 종일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고민했던 내가 너무 어리석었음을 깨닫는다. 비평가는 분석하고 다양한 해석을 하는 일을 했던 것이고 작가는 그냥 누가 뭐라 그러던지 자기의 느낌대로 가면 되는데 말이다.


요즘 친분 있는 작가님들에게 내게 소신껏 흔들리지 말고, 꾸준히 쓰라는 조언을 많이 듣는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자주 흔들리고 물통 안에 붓을 못 꺼냈던 여주인공처럼 한 번씩 브런치를 지웠다가 다시 깔며 자주 흔들린다.


결국 나에게 큰 숙제를 남겨주신 그녀에게 답이 다시 왔다. 두둥!

헐 작가님!
제가 아침에 잠이 덜 깨서 너무 아리송하게 써놨네요ㅠㅠ
작가님 글투가 너무 맛깔나서 스토리랑 찰떡으로 잘 어울린다는 말이었는데 죄송해요.ㅋㅋㅋ

작가님과의 댓글 해프닝은 이렇게 끝이 났고, 독해력의 한계를 느낀 나는 앞으로 더 많은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여전히 깊이 없는 글들을 쓰고 있다. 그게 들통날까 매번 전전긍긍이다.


낮에 아들에게 해석해보라고 보냈던 톡을 밤이 되어서야 아들이 명쾌히 설명해주었다. 도자 기안에 내용이 잘 어울린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고1 아들도 해석이 가능한 문장이 왜 그리 어려웠는지,,


멋진 나의 작가님,

질투 나는 거 맞고요. 계속 질투 날 예정이고, 그럼에도 부럽고 존경스럽고, 제 몫까지 연애 많이 해주시길 바랍니다. 꼭 맛나는 사랑 이야기 들려주시고요. 어마어마한 댓글 남기겟습니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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