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 해룡면 풍기리에 바람이 불면<1부>
1. 파란 기와집
by injury time Dec 17. 2021
좁은 골목을 돌고 돌면 맨 꼭대기 언덕 위에 그 파란 기와집이 있다. 툇마루에 앉으면 저 멀리 푸른 바다에 고기잡이 배가 내려다 보이는 그런 집이다. 소박한 방마다 누렇게 바랜 노란 장판이 꾸덕꾸덕 깔려있고, 늘 한쪽에 국방색 낡은 담요가 놓여있다. 사이좋게 나란히 서있는 방문 끝에 이 동네에서 제일 신식으로 꾸며진 주방이 양쪽 여닫이문을 활짝 연 채 일 년 삼백육십오일 맛난 밥 냄새를 풍긴다. 바지런한 안주인이 반짝반짝 닦아놓은 좁은 툇마루 위에는 손때 묻은 손잡이가 서까래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발 디딤돌과 툇마루가 높아 오르내릴 때마다 손잡이를 작신 힘주고 잡아야 내려갈 수 있다. 아마 이 집에 오랫동안 살던 어르신은 평생 이 손잡이에 의지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 집의 바깥양반 영순 아비, 상식은 살던 집을 팔고 이 집으로 이사 온 후 제일 먼저 의욕적으로 목재 몇 개와 1mm짜리 방풍비닐 한 롤로 툇마루 끝을 빙 둘러 바람막이 미닫이 문을 설치했다. 여름에는 활짝 열어 바람이 통하게 하고 겨울에는 바닷바람을 막아 집안의 온기를 유지시켜주기에 요긴하다.
누구나 이 집을 처음 보면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을 만큼 그런 평화로운 어촌마을의 마당 넓은 오래된 기와집. 평생을 살아오던 이 집 어르신이 돌아가시고 빈집으로 몇 달을 쓸쓸히 낡아가다가 상식 부부의 눈에 한방에 들어와 그날로 4천만 원에 이 집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귀퉁이에 녹색 페인트가 날름날름 떨어지고 녹이 슨 양철문이 항시 한 뼘쯤 열려있는 이 파란 기와집에 점심때가 다 지나서 다리 건너 사는 안순네가 대문을 삐그덕 열며 들어왔다.
"성님~"
툇마루에서 밥상을 치우던 영순 엄니가 안순네를 맞이했다. 안순네는 이 동네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며 곤란하게 사는 여인이다. 헝클어진 머리를 질끈 묶었지만 목덜미로 그나마 여러가닥 흘러내려 머리숱이 한 줌도 안 되는 볼품없는 모습으로, 기미가 잔뜩 낀 거칠고 윤기 없는 얼굴에 웃을 때 검붉은 잇몸이 드러나는, 그런 촌부였다.
"안순네, 자네도 밥 한술 뜨려나? 방금 우리 영순이랑 찬물에 짠지 얹어 한술 떴는데?"
영순 엄니는 먹다 둔 수저를 보리차에 대충 헹군 후, 보시기에 찬밥 한 덩이를 퍼주었다. 안순네는 밥 한 술을 푹 떠서 입안 가득 넣고는 오른쪽 입꼬리에 밥 티를 대롱대롱 매단 채 무슨 일로 불렀냐고 물었다.
"무신 일이긴. 옷장 정리하다가 안 입는 옷이 몇 벌 있길래 가져가라고. 영순아, 그 옆에 비니루 차대기 좀 줘봐라."
유난히 양볼이 발그레한 영순이 옆에 있던 비닐봉지를 안순네에게 건네주었다.
"워메 좋은 그. 이건 썽썽한데 왜 나를 준다요?"
안순네는 체크무늬 재킷을 자기 몸에 대어 보았다가 영순이에게 대어보았다가 싱글벙글이다.
"아이고, 우리 영순 아빠는 바람이 났는지 디자인이 구식이라고 안 입은다니까 자네 서방 입으라고 하소."
영순 엄니는 밥 먹기 전에 까다만 돼지감자 껍질을 까고 있다.
"아참, 안순네. 그저께 뻘에서 죽은 사람. 그 남자 어쩌다가 죽은 거랴?"
"아이고 그거 때매 동네가 발칵 뒤집혔당께. 뻘에서 뭔 짓 하고 놀아나다가 물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빠져 죽었는지...."
안순네는 혀를 길게 쭉 빼더니 김치 한 줄거리를 받아먹다가 손가락을 쭉쭉 빨며 눈을 끔벅끔벅 감추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영순이가 금시초문인 듯 영순 엄니한테 물었다.
"엄니, 동네에 누가 죽었어?"
영순 엄니는 영순이에게 화를 버럭 낸다.
"지랄, 조막만 한 게 으른들 야그 하는데 끼어들어 참견이여!"
영순이는 시무룩해져서 툇마루 끝에 걸터앉아 마루 밑 방울이를 괜히 쓰다듬었다. 영순 엄니는 영순이를 힐끔 쳐다보다가 소곤거린다.
"뭐야? 아직 누군지도 모른단 말이야?"
"아우, 우리 동네 사람은 아니지라. 근디 홀딱 벗고 죽었고 옆에 옷이랑 신발이랑 그런 것들이 같이 밀물에 떠밀려 왔다요. 세상 요상한 일도 다 있어라."
안순네는 가랑이 속이 더운지 치마를 몇 번 털썩털썩 털며 깎아놓은 돼지감자 조각을 와그작와그작 씹어댔다.
"금메, 죽은 사람 옷이 떠밀려 왔다고? 그럼 바닷가에서 옷이랑 신발까지 벗고 뭘 했을까나?"
그녀는 호기심 가득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돼지감자만 열심히 까고 있다. 동글동글한 돼지감자가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수북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순천시 해룡면 풍기리는 얼마 전 바닷가에 떠밀려온 젊은 남자 시신 하나로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가끔 물때를 모르고 낚시꾼들이 갯바위에 앉아 낚시를 하다가 물이 들어와 바위 위에 갇히거나 또 밀물에 휩쓸려 죽기도 했다지만 풍기리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일들이다. 늘 조용하기만 하던 마을은 뒤숭숭해져 서로의 상상력으로 죽은 청년을 뒤쫓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