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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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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jury time Sep 16. 2021

믿어지지 않겠지만 5.


다음날, 침대에 누워있는 그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있고 열꽃으로 얼굴이 뜨거워 보였다.


"집에 가서 어머니랑 같이 있는 게 좋겠어. 오빠 어머니한테 빨리 전화해봐"


그가 전화기를 들었는데 눈앞이 흐리다며 유연에게 전화기를 건네며 눌러달라고 했다.


"눈이 왜 안 보인다고 그래?"


유연은 무심하게 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얼마 후 그는 구급차에 실려 사촌 형과 함께 응급실로 옮겨졌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유연은 그날 출근을 못하고 그가 떠난 자리의 흔적을 꼼꼼히 지워나갔다. 별일이 아니기를 바라며 오늘이 마지막 날이길 바라며 그의 흔적을 지웠다. 준혁이 놓고 간 작은 스케치북에는 그가 스케치한 숲과 동굴, 그리고 유연의 모습이 가득했다. 흔들리고 싶지 않아 그대로 준혁의 가방에 쑤셔 박아 넣었다. 커플 찻잔과 그의 수저와 칫솔과 오래된 면도기와 낡은 운동화와 늘어난 속옷과 양말을 버렸다. 그가 먹다 둔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버리고 그가 좋아해서 자주 해 먹던 두부조림을 버리고 궁상맞게 뜯어먹던 식은 피자도 버렸다. 그는 식은 피자 먹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어젯밤까지 베고 잤던 땀에 절은 베개까지 버렸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고 이불과 패드를 세탁기에 돌렸다. 가을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와 모든 기억을 싣고 나갔다. 충분히 다시 태어날 준비가 된 듯했다.    


하지만 유연은 결국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얼마 후, 그의 친구에게서 그가 시력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고열과 함께 찾아온 바이러스는 시신경에 손상을 입혔다. 젊은 당뇨 합병증이었다. 며칠을 의식불명으로 중환자실에서 보냈다고 했다. 겨우 의식은 회복되었으나 앞을 못 본다고 그의 친구는 전해왔다. 병원으로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그는 유연을 보지 않겠다고 했다. 유연은 자주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 의자에서 밤을 새웠다.


몇 달이 지나고 유연은 준혁을 가슴속에 꾹꾹 박아놓고 하루하루 견뎌갔다. 문득문득 가슴에 박아놓은 그가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오는 날이면 유연은 서둘러 낯선 남자를 만나 작은 소파에서 섹스를 했다.






"잘 지내냐? 이번 주 주말에 서울 갈까 하는데 터미널로 좀 나와줄래? 서울 가서 뭐 살 거도 있고 좀 돌아다니고 싶어. 어머니가 버스 태워주신대"


어느 날 준혁은 유연을 다시 찾았다. 그는 복지관에 다니면서 조금씩 적응하고 있다고 했고 복지관에 매고 다닐 배낭을 사러 가자고 했다. 사소한 구실로 그들은 다시 만났다.


그는 정말 멀쩡해 보였다. 몇 달 고생하다 이제 다시 보이게 됐다고 말할 것 같았다. 정말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시신경은 완전히 죽어버렸고 세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얄밉게도 잘만 돌아갔다. 그렇게 그들의 불행은 준비할 겨를 없이 찾아왔다.


그들은 꽃시장 방향 승강장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 유연은 팔꿈치를 내어주며 명동을 천천히 돌아다녔다. 어두운 길에서 눈에 띄어야 한다며 새하얀 가방을 사고, 그가 좋아하는 메뉴인 일본식 돈가스를 찾아 헤맸다. 자리를 잡아 의자를 빼주어야 했고 그를 조심히 앉혀야 했고, 나란히 앉아야 했다. 돈가스는 조각조각 잘라놔줘야 했고, 포크를 손에 쥐어줘야 했다. 단무지는 콕 집어서 입에 넣어줬고 입 언저리에 묻은 소스를 닦으라며 티슈를 손에 쥐어줘야 했다. 갑자기 어린아이가 된 듯했다. 여리고 여린 유연은 그가 사람들과 부딪힐 때마다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게 익숙지 않았던 유연은 자주 그를 놓쳤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저기 가보자, 이거 어때,  여기 조심해! 하면서 와닿지 않은 말들을 하며 둘은 헤매고 헤맸다. 덜컹거리는 사당행 지하철  장애인석에 앉은 준혁은 투덜거렸다.


"씨발, 아무것도 안 보여. 내 눈, 장님 눈처럼 쪼그라들었어?'

"아니야. 멀쩡해. 누가 보면 그냥 멋 내려고 쓴 선글라스인 줄 알 거야."

" 이 가방, 이상한 거 아니지? 너 니 스타일대로 요란한 거 사면, 죽는다!"


준혁은 행동은 느려졌고, 말은  많아졌고, 몸에서는 병자의 냄새가 났으며, 얼굴과 손가락은 노래졌고, 손가락과 목덜미의 문신은 힘없이 쭈그레졌다. 그리고 그는 유연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날 유연은 그의 배에 인슐린 주사를 놓는 법을 배웠다.


아무도 없는 에 준혁은 유연이 퇴근하고 돌아올 때까지 하루 종일 혼자 지키고 있는 날이 늘어났다. 주말이면 준혁을 데리고 산책을 다녔다. 이대로 라면 결혼을 하고 같이 욕심 없이 살아도 될 것 같은 용기도 조금 생겼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연의 부모님이 올라오신다고 연락이 오면 부리나케 준혁을 근처 모텔로 숨겨야만 했고 그런 수고로움에 점점 지쳐갔다. 용기가 생길 때마다, 그동안 헤어졌었어야 했던 수많은 일들이 기억의 저편에서 바글바글 기어 나왔다. 결국 오랜만에 찾아간 그의 집 앞, 그의 전화통화는.... 결국을 만들었다.


"어머니, 내 방 책상 유리에 꽂아둔 그 애 사진 좀 빼서 치워놔요. 지금 유연이랑 가고 있어요."


유연이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어머니와 통화를 했지만 그녀는 그 통화를 정확히 들을 수 있었다. 유연은 다시 현기증과 멀미가 쏟아져 나왔다. 머릿속이 까매지고 구역질이 났다. 준혁은 달라진 유연을 알아챘고, 썩은 가래가 목젖에 달라붙어 나오지 않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별 사진은 아니야. 그냥 버리기 뭐해서 꽂아두라고 했던 거야. 씨발. 니가 기분 나쁠까 봐 빼라고 한 거고."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그는 사진을 본다. 유연은 그날, 준혁을 놓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유연은 급히 적극적으로 소개팅을 하고 채팅 사이트 같은 데서 결혼할 남자를 물색했다. 소탈하고 건강하고 어딜 가나 인사  잘하는 사람이면 족했다. 그리고 유연은, 시골 농협에 착실히 다니는 반듯한 남자와 결혼을 약속했다. 집 앞만 나가도 이웃끼리 웃으며 '요 옆 농협 총각 샥시~'라며 인사할 것 같은 남자면 됐다. 다행히 그 농협 총각은 유연의 찰방찰방한 가슴을 더없이 사랑했다.


- 다음 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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