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곡선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준혁과 유연은 안과 겉이 모호한 상태로 오래된 애인이라는 명제로 낙인찍히는 순간 위반되고, 위반되는 순간 다시 끈덕지게 애인으로 묶이는 끊임없는 굴레의 수레바퀴에 올라타버렸다.
졸업 후 취업이 되어 유연은 회사 근처에 월세방을 얻었고, 준혁은 휴학을 하고 월세집을 빼고 천안과 유연의 집을 오고 갔다. 그때부터 준혁은 점점 거칠어졌다. 자주 사람들과 시비가 붙고 입에 욕을 달고 살았다. 또 더 깊게 자신만의 세계에 닿으려고 했다. 자주 훌쩍 떠나 외딴 길에서 며칠을 보내며 그림을 그렸고. 오고 싶으면 문득 유연을 찾아오는 방랑자 같은 생활을 했다.
그에 비해 유연은 작은 출판사에서 디자인 업무를 맡아서 일하며 안정적인 삶을 꿈꿨다. 얼마 되지 않은 최저시급을 받고, 유연은 항상 일은 많고 시간은 부족했다. 준혁이 얼른 졸업도 하고 자리를 잡기 바랐지만 그는 유연 옆에 없었고 저 멀리 구름 속이나, 그가 그린 인물화의 눈동자 안에 숨어 있었다. 유연은 늘 외로웠고 그를 그리워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준혁과 만난 지 5년째가 되어 가고 있었다. 속절없이 지나는 시간 속에 준혁의 여자들을 봐왔고, 그의 방랑을 봐왔지만 웬일인지 유연은 번번이 벗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뫼비우스의 띠에 올라탄 듯 제자리에 서있는 자신을 보며 좌절했다. 유연은 번번이 그와 헤어질 순간들을 여러 번 놓쳤다.
"자네는 초년에 좋은 운을 다 써버렸어!"
어느 사주카페에서 들은 준혁의 사주풀이는 매번 유연의 발목을 잡았다.
그날 그 사주카페에서 그의 아버지를 우연히 봤던 이유였을까
"어, 저기 아버지 지나가신다. 잠깐 나갔다 올게"
준혁은 그가 초등학생일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셔서 어머니 손에 키워졌다. 어릴 때는 집안 형편이 좋아서 기사 딸린 자가용을 끌었다 하니 상당한 재력가 집안에서 자란듯했다. 하지만 사업이 망하고 부모님은 이혼하고 매번 고추장에 밥 비벼먹는 게 일상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런 아버지를 몇십 년 만에 우연히 알아보았던것이다. 아버지는 어린 이복동생과 영화를 보고 오는 중이라고 했다.유연이 창가에서 내려다본 그들의 모습은 '도를 아십니까'의 낯선 사람들 같았다. 반가움과 경계의 기류가 흘렀다. 돌아온 준혁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코웃음을 지었다.
"씨발, 내가 딱 저 나이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갔는데!"
매번 우울했고 매번 불만스러웠고 매번 짜증을 냈지만준혁은 유연에게는 집착했다. 밤이 되면 준혁은 주인 없는 떠돌이 개처럼 유연의작은 집으로 들어와 이불속으로 다시 숨었다. 유연의 젖꼭지를 깨물며 밤을 달렸던 준혁은 결국 아무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새벽에서야 잠이 들었다.
달빛 그림자가 그들의 깊숙한 곳으로까지 드리워지던 어느 날,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대부분 사람들은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결과가 어떻게 나올 거라는 걸 어렴풋이 안다. 알면서 모른 척 계속 직진하기도 하고, 슬쩍 핑계를 대고 물러나기도 한다. 모두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예측을 하고 준비를 한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은 그와 그녀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고, 믿어지지 않는, 준비도 안된 채 어두운 실현과 맞닥뜨렸다. 그들에게 너무나 무섭고 갑작스러운 일이 일이었다.
그날, 밤새 그는 유연을 찾았다. 하지만 유연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가보지 않았다. 그날도 둘은 저녁을 먹으면서 말다툼을 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유연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준혁은 졸업도 하지 않은 채 배낭 하나만 매고 바쁘게 헤맸다. 얼마 전에 제주도 사는 친구의 부탁으로 돌하르방 캐릭터를 디자인해주고 50만 원을 받았고, 또 얼마 전에는 졸업한 학교 학생회에서 현수막 디자인을 해주고 50만 원을 받았다. 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카운터에 앉아서 넋 놓고 그림만 그렸다가 사장과 싸우고 관두면 그만이었다.
그날은 준혁의 낯선 여자가 찾아오고, 옷이 갈기갈기 찢기던 날이었다. 준혁은 사랑하는 유연의 젖꼭지를 깨물다 말고 말한다.
"그 애는 내가 쌌는데도 내 위에서 계속 흥분하고 그러더라, 씨발"
오래된 상처는 문득문득 유연을 바람 빠진 풍선으로 만들어 쭈그러뜨렸다. 유연의 가슴은 더 이상 부풀지 않았다.부풀지 않은 유연을 뒤로 한채 준혁은 머리가 아프다며 등을 돌려 누워버렸다. 유연은 조용히 잡동사니만 쌓여있는 쪽방에 가서 고양이처럼 숨었다.
그날, 밤새 그가 애타게 유연을 불렀으나 그녀는 준혁에게 가지 않았다.
"김유연, 유연아, 씨발 유연아, 잠깐 와봐. 김유연!"
유연은 준혁의 썩은 목소리를 듣고도 귀를 틀어막고 나가지 않았다. 이불속에서 유연은수천번 이별을 연습했다. 그날 헤어졌어야 했다. 헤어져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었다. 그날 그 밤은 유연에게 또 한 번의 이별을 놓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날.... 나갔어야 했다.
-다음 편에 계속
이 소설은 지난 제 짧은 한 장짜리 단편을 확장시켜 쓴 글입니다. 그때 그 글이 너무 짧아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내내 찝찝했습니다. 게네가 얘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