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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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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jury time Sep 09. 2021

믿어지지 않겠지만 3.


내가 얘네들을 처음 만난 건 천안 예고 잔디운동장에서였어.
천안 예고 5월 축제였거든.
한봄인데도 날이 따뜻해서 내가 기지개 춤을 추며
게네들을 따라다녔었어.
어찌나 얘네들, 빛나던지.



"봤어? 그 대학생 오빠 말이야?"

"오. 좆나 잘생겼던데, 우리 학교 선배라며?"

"회장 김유연이 공수해온 인물이래. 갠 못하는 게 없어, 그렇지?"


천안예고 3학년 학생회장, 유연은 5월 축제때 공개할 잔디운동장 벽화 그리기에 참여할 프리랜서를 찾고 있었고, 학교 옆 미술학원 출신 준혁을 소개받았다. 준혁은 서울에서 회화과 2학년을 다니고 있었고, 서울에서 천안까지 통학버스를 타고다녀 시간이 조금 빠듯하기는 했지만 흔쾌히 같이 일하고 싶다고 했었다.

준혁은 구릿빛 얼굴에 건장한 체구, 다부진 모습을으로 교정에 들어섰다. 그날은 중간고사가 끝나는 날이라 학생들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고 미술반 학생들 몇 명과 전교회장 유연만 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 아디다스 스니커즈를 신고 허벅지 반이 드러나는 반바지에 회색 후드티를 입은 준혁은 다소 껄렁거리는 얼굴로 학생들에게 인사를 했다. 유연과는 두 번째 만남이다. 준혁은 유연 옆에 자연스레 앉으며 벽화의 콘셉트에 대해 이야기했다.


"축제까지 열흘 남았어요. 미술부 친구들이 대부분 만들어가겠지만 선배가 아우트라인은 잡아주셨으면 해요."


회장 김유연은 스케치한 구성안을  준혁에게 건넸다. 회의는 생각 외로 길어졌다. 학생들과 준혁의 의견이 맞지 않아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는 돌고 돌았다.


"너무 늦었어요. 이쯤 하고 우리 각자 자기가 맡은 장소 콘셉트를 정해서 다시 만나요."


유연이 나갈 준비를 하며 벌떡 일어났다.


"가지 마"


준혁이 갑자기 유연의 손목을 잡았다.


"같이 나가자."


준혁은 유연에게만 들리게 낮은 목소리로 같이 나가자고 말하고 있었다. 유연의 손목을 어찌나 꽉 잡았는지, 유연은 자기도 모르게 다시 의자에 앉아버렸다. 준혁의 단단한 팔목의 힘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학생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서로 인사를 할 때까지 준혁은 유연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유연의 마음의 촉수는 말하였다. 그가 그녀의 인생에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그날,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반항기 있는 날카로운 준혁의 눈동자 안에도 유연이 가득 들어가 버렸다. 사랑은 그렇게 준비도 없이 그들에게 꽂혔다.


5월 천안 예고 축제 이후, 준혁과 유연은 늘 우윳빛 나를 매달고 다녔다. 내가 그늘에서 좀 쉬려고 해도 어느새 그들의 향기가 나를 붙들었다. 나는 홀린 듯 아른아른 그들을 쫓아가야 했다. 유연은 입시 준비를 하면서도 매일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하는 준혁과 늦은 저녁을 먹었다. 유통기한을 넘긴 삼각김밥이나 도시락이 그들의 늦은 저녁 식사였지만 가난한 그들은 행복했고 행복했다. 정말 행복해 보였다. 이상하게 깜깜한 밤에도 그들에게는 폴폴 빛이 났다. 별빛 옆에서 깜박깜박 졸린 눈을 비비며 지켜보던 내가 부러움에 한숨을 후~쉬면 그들에게 여지없이 찬란한 별빛이 쏟아지곤 했다.  


청춘의 시간은 다른 시간들보다 좀 더 빠르게 지나간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자주 쓸어 올리는 준혁의 머리카락은 어느덧 유연의 손길이 대신했다. 그리고 준혁의 앞머리를 넘겨주며 유연은 그의 반듯한 이마를 사랑하게 되었다. 반무테 안경을 연신 추켜올리며  꽉 다문 준혁의 각진 입술을 사랑하게 되었다. 콧대 높은 콧날은 안경을 착 걸치기만 했는데도 준혁의 콧방울에 윤이 났고 유연은 자주 그 콧방울을 깨물었다.


유연도 얼마 후, 서울에 있는 대학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하여 그들은 좀 더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만난 지 1년째 되는 날, 유연은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평소에도 기획력이나 엉뚱한 생각을 잘하던 유연은 1년 된 기념으로 '헌혈의 집'에 가서 나란히 앉아 헌혈을 할 계획을 세웠다. 모두들 어이없어 했지만 준혁은 재밌겠다며 유연을 칭찬해줬다.

난생처음 해보는 헌혈에 사실 약간 긴장한 쪽은 유연이었다. 생각보다 피는 한참 뽑혀 옮겨졌고, 끝나고 나서는 현기증이 났다.


현기증 나는 달콤한 그날, 그들은 처음으로 섹스를 했다. 어두운 준혁의 지하 원룸에는 서늘한 지하실 냄새와 싸구려 방향제 냄새가 섞여 비릿한 공기로 가득했다. 봄비가 왔는데 그날 켜놓은 음악방송에서는 오래된 팝송 she's gone 이 흘러나왔다. 어두운 방 안, 높은 창문으로 어른거리는 빗줄기를 보며 그녀는 준혁을 안았다.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파묻은 준혁을 유연은 신기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와  눈이 잠깐 마주쳤는데 준혁의 모습이 콧수염 난 조니뎁처럼 보여 조금 웃겼다.


준혁은 그녀의 발가락과 손가락과 젖꼭지를 사랑했다. 아니 뭐든 그녀의 동그란걸 다 사랑했다. 그녀의 숲 속에 숨은 살구색 진주는 더없이 동그랗고 동그랬다.


유연은 씩씩하고 담대하게 첫 경험을 완수했고 이제 조금씩 성숙한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세틴 끈 나시에 노브라로 다니는 그녀는 자유로워졌고, 찰방찰방 연의 젖꼭지는 자주 흔들렸다. 빛나는 시절이었다.


대학을 들어가고 졸업하고, 그가 군대에 갔다 올 동안 한결같이 그들은 하나였다.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이 한 사람만 바라보며 청춘을 낭비했을까 싶을 만큼 그렇게 그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천안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 유연을 늘 준혁이 버스승강장에서 그림을 그리며 기다렸다.



아! 그시절에 내가 터미널에서 게네들을 본거구나옹.
맞어, 게네들 예뻤어.
 에잇, 나도 암컷 사겨보고 싶네.
난 다리 길고 눈 쫙 찢어진 암컷이 좋더라 미야오~



우윳빛 아지랑이가 먹구름 사이로 숨어버리고, 어느덧 회색빛 뫼비우스의 띠가 그들을 천천히 감싸고 있었다.



- 다음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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