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와 저는 서울역 근처에서 만나 남산으로 산책을 갔어요. 3년 만에 만났더니 별로 공유할 만한 이야기도 없더라고요. 그때 그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폰에서 갤러리 창을 열어 넘기고 넘기고 넘겨 단체 사진 한 장을 펼쳐 보여주더라고요.
- 여기 사진이 남아있어요. - 아, 평창에서 찍은 사진이군요.
사진은 자원봉사자들과 스텝, 올림픽 관계자들 100여 명과 찍은 단체사진이었죠. 깨알 같은 사람들을 살피며 낯익은 사람을 찾았어요. 너무 오래전 사진이라 폰을 바꾸면서 사라져 버린 사진이라 이제 와서 보니 무척 반갑고 신기하더라고요.
- 여기요.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J가 사진을 확대하고 확대해서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더라고요. 화질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예쁜 애 옆에 예쁜 애가 저라니, 어이가 없어 그에게 눈을 흘겼지요.
- 왜요? 자세히 보니 옆에 있는 애가 더 예쁜가? ㅎㅎ
그는 능청스럽게 눈을 반짝였어요. 저를 보고 반짝이는지, 제 옆에 있다는 애를 보고 반짝이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분은 좋았어요. 서른다섯 먹은 여자에게 예쁜 애라니, 저는 인디언 보조개까지 바짝 쪼이며 웃었지요.
- 라면 먹고 갈래요?
그날 밤, 저도 고전적이지만 능청스러운 이영애의 '라면' 멘트를 날리며 J를 데리고 저희 집으로 향했죠. 사실 어린 시절 남자친구 이 외에 10여 년 동안 새롭게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를 갖고 그런 적은 없었기에 무척 어색하기도 했지만 최대한 시크하고 무심한 포부로 드디어 그를 저희 집 거실 소파에 앉히는 데 성공했어요.
두근두근...
J를 소파에 앉히는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리고 나니 막막하더라고요. 우리는 한동안 멀찍이 떨어져 앉아 서로의 숨소리만 듣고 있는데 J가 먼저 입을 뗐어요.
- 양말이나 벗자. - 그래야겠다. 좀 답답하네.
J가 저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제 당근무늬 조막만한 양말을 조심히 벗겨주더라고요. 그리고 그는 녹두알만 한 저의 발가락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조물조물 꼼지락거리고는 얄상한 내 아킬레스건부터 오동통한 종아리까지 한입한입 정성껏 맛보았어요. 정말 오랜만에 우리는 작은 소파와 작은 침대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몽크를 했습니다. 그때 처음 알았어요. 섹시한 물방울 놀이를.
다음날 늦은 아점을 먹고 러시아 문화원에 방문하여 러시아 영화를 여러 편 보고 왔습니다. 스무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정말 작은 소극장에서 한글 자막도 없는 러시아영화를 보는 일은 몸살 나게 지루했어요. 하지만 J의 표정이 세상 진지하고 즐거운 거 같아서 조용히 그의 옆에서 쌕쌕 아주 작은 소리로 코를 골며 부족한 잠을 쪽잠으로 때웠습니다.
그는 러시아 문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여행을 다니고, 콘텐츠를 만드는, 나름대로 생활형 예술가였어요. 게다가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삶에 충실한 넋셔리한 비혼주의자였죠. 맞아요. 제가 보기에는 넋 나간 인생 같은데 암튼 그는 우아하게 그렇게 자기 삶을 꾸려나가고 있더라고요.
저와 알고 지낸 지 10년째인데도 도무지 자신의 삶에 저를 끼워 넣지 않는 게 어쩜 섭섭해서 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좀 억울하기도 하고, 같잖기도 하고, 뭐 좀 그렇더라고요.
저도 뭐 딱히 그와 남은 인생을 살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저는 언젠가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언제든지 갈아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강한 자신감으로 그와 한 달에 한번 신나게 몽크를 하고 쿨하게 헤어지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저는 우연히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예쁜 애 옆에 예쁜 애'라는 작가명을 갖게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