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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jury time Oct 06. 2023

어린 자기

#13

지호와 현민는 어린 것들이 서로에게 '자기야'라고 불렀다.

- 자기야, 나 그래도 또 하고 싶어.
- 안돼.
- 자기 우리 이모 때문에 화났어?
- 아니야, 공부해야지. 우리 대학 가면 만나자.
- 자기 나 안 만나고 살 수 있어?     

미니비숑 한 마리가 소녀의 머리카락 속을 파고들어 헤집어논다. 아침이 훨씬 지난 시간인데 비숑의 밥그릇엔 말라 비틀어빠진 참치캔 찌꺼기만 눌어붙어 있다. 급수기 입구에는 아까부터 마지막 물 한 방울이 떨어질 듯 말 듯 대롱대롱 매달려있고.

어지러운 침대 위에 이불을 둘둘 말고 엎드려 자고 있는 어린 소녀. 팔한쪽과 다리 한쪽은 이미 바닥을 향하고 있어 금방이라도 침대에서 굴러 떨어질 태세다. 다행히 비숑이 소녀의 머릿속을 파고들고 꼬랑지를 흔들어 깨우는 통에 소녀는 비숑을 품에 안아 이불속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두 눈이 퉁퉁 붓고, 통통한 볼은 열이 있는지 빨갛게 달아올라있는 소녀는 현민의 여자, 지호다.

지호의 방은 일곱 평 남짓되는 작은 방이다. 방에는 고작 삐그덕거리는 싱글침대 하나와 나지막하고 소박한 화장대와 아무렇게나 쌓인 옷으로 뒤범벅이 된 오픈형 옷장이 전부다.

설정 온도 30도로 지호의 원룸 보일러는 아침까지 미치게 돌아가다 좀 전에 멈췄다. 방안은 찜질방처럼 후끈후끈. 하지만 지호는 여전히 이불을 둘둘 말고 침대에서 나오지 못한다.


오후가 한참 지나서야 잠에서 깬 지호는 아직도 침대에 누워 폰을 뒤적거리고 있다. 어젯밤 현민과 통화만 두 시간. 그리고 현민의 부재중 전화 스무 통, 그리고 다시 현민과 통화를 한 지호는 겨우 진정을 하고 방에 들어와 잠이 들었었다. 그 시간이 아마 새벽 다섯 시가 넘어서였을 것이다. 어찌나 춥고 허전한지 지호는 보일러 설정 온도를 30도까지 올리고 이불속으로 들어갔었다.

지호는 새벽에 현민과 통화한 기억이 아주 예전의 기억처럼 희미하다. 마치 드라마나 소설책의 얘기처럼 낯설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현민은 어젯밤 지호에게 이별통보를 해왔다. 임신은 웃픈 해프닝으로 끝이 나고, 이제 둘 사이의 감정 정리만이 남았다며 현민은 지호를 타일렀다. 지호는 이 모든 게 학대이야기를 꺼낸 이모 탓이라며 이모를 원망했다. 그리고 형편없이 현민에게 매달렸다.

지호는 학교를 그만두고 한동안 자유를 만끽하며 소개팅 앱에서 여러 친구들을 만나 사귀고 헤어지기를 반복했지만 현민처럼 마음을 다해 사랑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현민을 놓칠 수 없었다.

현민을 만나면서 먹던 정신과 약도 줄어들고 점점 일상으로 나아갈 용기도 생겼다. 매번 아르바이트를 시작해도 일주일을 못 가고 그만 두기 일쑤였고 혼자 지내다 보니 새벽까지 놀다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으로 일상생활이 도무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 쓰레기 같은 년."


지호의 아버지는 지호를 원룸으로 내다 버리며 신용카드 한 장을 던져 놓고 사라졌다. 지호를 키운 건 신용카드와 비숑이었다. 가끔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라고는 이미 다른 남자와 재혼한 지호의 친엄마와 욕심 드륵드륵 붙은 이모뿐이다. 학교를 그만두고 원룸으로 얻어 나온 후로 지호는 친구들과도 점점 연락을 하지 않았고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소개팅 앱에서 알게 된 변태 아저씨들 뿐이었다.

하지만 현민을 만난 후 지호는 다시 애견미용 학원에 등록을 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해나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했던 현민의 이별 통보를 지호는 도대체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로가 이토록 사랑하는데 왜 헤어져야 하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참으면 되잖아. 섹스하자고 안 할게."

"그것 때문에 헤어지자는 거 아니야. 이제 공부 다시 시작해야겠어."

"자기야, 한 달에 한 번만 만나고 연락도 자주 하지 않을게. 제발."

"너도 다시 학원 다니고 열심히 살자. 그리고 어른 되면 다시 만나자."

"난 자기 못 보고는 못살아."


지호는 끝없이 매달렸지만 이미 단호하게 변한 현민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지호는 끝내 어젯밤 새벽에 원룸 옥상을 올라가 뛰어내린다며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폰을 접고 한동안 현민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호가 극단적인 시도까지 한다며 전화를 끊고 연락이 되지 않자 현민은 밤새 안절부절 죄책감에 시달렸다. 매번 유행가 가사 내용도 못 알아듣는 녀석이 귀엽다며 쯧쯧, 거렸던 엄마 생각이 났다. 이제는 유행가 가사가 모두 자기 얘기 같이 절절하게 마음에 와닿았다.  

현민은 지호에게는 아빠이자 엄마이자 애인이었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생활에서 매일 연락을 하며 안부를 묻고 끼니를 걱정하고 그리움이 차오르면 꿈결처럼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눈부시게 빛나는 사이였다. 그런 사랑을 이제 끝내야 한다니 지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멋들어지게 원룸 옥상에서 뛰어내려 모든 사람들에게 엿을 먹이고 사라지고 싶었으나 지호는 그럴 용기도 없었다. 현민과 보낸 시간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결국 서로를 열심히 응원하자며 현민이 울먹이며 통화는 끊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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