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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jury time Sep 28. 2023

남편에게 양해의 말씀을 남기고 떠나리라

#12

클리어 한 답변이 돌아왔다. 통화 내용은 충분히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대화라고 했다. 게다가 이모라는 사람이 자경에게 협박과 모욕을 준 게 더 문제라면 문제라고 했다. 이모라는 사람이 진짜 이모인지, 아는 지인인지, 어쩐지도 모르고 우리 측에서 수그리고 들어갈 일이 아니라고 했다. 만나서 사과할 필요 없다고 했다. '사과'라는 단어를 쓰는 순간, 일이 정말 그렇게 돌아갈 수 있으니 만나지 않은 게 좋겠다고 했다. 더 이상 엮이지 않고 원만하게 헤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자경은 크게 안도했다.

남편 상식이 조차 자경 편을 들어주지 않고 원망만 했었는데, 변호사둘이나 자경 편을 들어주니 며칠 동안 정신없이 폐허에 서있다가 조금은 당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변호사 사무실에 용기 내어 문을 두드린 자신이 더없이 멋있어졌다. 아무 문제없는 거다.


문제는, 이제 지호가 임신이냐 아니냐는 거다. 변호사까지 나서서 배란일을 따지며 지호의 임신여부를 점쳤다. 날짜를 봐서는 절대 임신일리가 없다며 지호를 꽃뱀 취급 했다. 아무래도 둘이 소개팅 앱에서 만났고, 지금 지호가 학생이 아닌 게 더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린 여자 아이의 배란일에 모든 어른들이 손가락으로 날짜를 헤어리는 꼴이 참 웃기는 상황이었다. 변호사는 혹여나 임신이라면 양쪽 부모끼리 만나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그 집이 부자라는데 그 여자애네 집에서 변호사 빵빵하게 써서 현민이를 성폭행범으로 고소하면 우리 집 거덜라는 건 시간문제야! 그리고, 저 새끼 전과자 되는 거야!"


변호사의 답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식은 자신만의 뇌피셜을 펼치며 극단적으로 치달았다. 전혀 가장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자경 뒤에 숨어서 악담만 쏟아내는 무책임한 남편에게 자경은 번번이 실망했고, 하루하루 원망이 더해져만 갔다. 단순히 아들에 대한 원망의 화살이 남편인 상식에게 돌아갔는지는 잘...

그동안 집안 대소사에 늘 한걸음 떨어져 몸을 사렸던 남편. 자경이 유방암 2기였을 때도 돈돈돈, 치료비 걱정만 하고 바쁘다며  장모에게 자경의 수발을 들게 하고 방관했, 아이가 유산됐을 때도 매번 그러듯이 자경 옆에서 술이나 자작하며 보냈던... 서로 어떠한 의지도 기대도 없이 살아왔던 자경의 세월이 한심했달까.

현민의 일련의 사고로 자경은 무언가에 띵, 머리를 맞고 이제야 선명해진 것도 같았다.

그도 그동안 월급 통째로 아내에게 맡기며 열심히 직장 생활했다고 억울해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집 안의 가장은 돈만 벌어오면 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패배자가 되긴 싫어 어떻게든 발버둥을 친 것 같다. 그러나 자식과 남편, 가족 모두 이렇게 바닥을 치고 나니 더 이상 나아질 게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는 상상까지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토록 염세적이었던 그녀가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날개를 접고 새장 안으로 스스로 들어간 선택은 그녀의 뼈아픈 실수였을까. 자경의 마음속 깊은 곳에 발칙한 소망의 불씨는 아들의 외도 아닌 외도로 그때 그렇게 자라나고 있었다. 뭐 큰 귀책사유가 있어야 부부가 헤어지는 건 아니다. 어릴 때는 실수였고, 더 이상 참기에는 이제 싫증이 났고, 더없이 실망했고, 실컷 엿을 먹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는 그냥 그냥 혼자 돈 벌며 그렇게 혼자 먹고살면 행복할 사람이란 생각에 그녀는 확신에 확신이 들어가고 있었다.

스스로 버려지리라. 자식들이 다 성인이 되어부모 손이 필요 없어지는 황혼이 되면 그때는 정말 훨훨 버려지리라. 남편에게 양해의 말씀을 남기고 그렇게 떠나리라. 자경의 발칙한 소망이라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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