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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jury time Oct 10. 2023

나는 솔로

#14

다음 날 현민은 하얗고 가늘고 긴 약지 손가락의 그토록 반짝이던 지호와의 커플링을 책꽂이 높은 곳 위에 빼놓았다. 긴 터널을 통과한 듯 답답했던 마음이 후련해졌다. 우선 임신이 아닌 것도 그렇고 걱정거리들이 한순간에 해결된 기분이었다.

바쁘게 서울과 포천으로 오가던 시간들을 이제는 동네 도서관과 싸구려 커피숍에서 노닥노닥 나른하게 보냈다. 아직 책을 펴면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져 오래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을 수 없었지만 대학 원서까지 쓰고 보니 현민은 이제 와서 불확실한 현실에 더욱 참담해져만 갔다.

현민이 원하는 과를 지원하기 위해서 그나마 국립대학 위주로 원서를 썼다. 현민이 원하는 과는 대부분 국립대에 포진해 있었다. 그리고 현민은 수능 최저를 맞추기 위한 마지막 스퍼트를 불태웠다.


현민에게 첫 여자였던 지호는 그 후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학교로 찾아오기도 하고,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며 현민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민은 그럴수록 지호에게 냉담하게 대할 뿐이었다. 현민의 마음속에 지호가 아직 들어있는지 아닌지, 모두가 모호한 상태로, 불안한 시기의 현민은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 옛날의 현민이 느꼈던 '사랑을 놓치고 우주에서 가시밭 지구로 떨어지는' 기분은 적어도 들지 않았으리라 본다. 모든 감정은 서랍 깊숙이 넣어놓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살자. 현민은 섣부른 행동으로 큰 대가를 지불했어야 했던 고3의 청춘을 정리해 나가는 듯했다.    


"벌써 용돈 줄 날이구나."

"걱정 말아요. 엄마. 얼마 안 남았어요. 올해만 지나면 제가 벌어서 쓸게요."


현민이 문득 엄마에게 뜻밖의 선언을 했다.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세상이 아들 생각하는 대로 녹록지는 않을 텐데. 자경은 아이가 이제는 엄마 손을 벗어나 멀리 떠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 이제 내년부터는 핸드폰 요금부터 네 보험료까지 현민이 네가 책임지고 관리하는 게 좋겠구나."


자경은 못내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더욱 어깃장을 놓고야 말았다.


최대한 부모와 떨어져 낯선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현민은 지방의 한 국립대학에 합격을 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원서를 쓰면서부터 기상청에 들어가는 목표를 세우고 스무 살의 다채로운 대학생활을 꿈꾸는 현민은 이제 고3 사춘기가 아닌 어느덧 근사한 청년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년 국회의원 선거때나 보자.  




자경은, 손안에 쥐고 있던 아들을 놓아주고 다른 한 손을 돌아본다. 아직 자경의 손이 필요한 둘째 아들이 발가락 사이의 때를 손가락으로 후벼 파며 낄낄 유튜브를 보느라 여념이 없다. 앞으로 유명 유튜버가 되겠다는 둘째 아들은 벌써 이름까지 지었다. '홍대피플' 꽤 중딩 같은 이름이다. 자경에게 아직은 깨알 기쁨을 주는 둘째 아들이 있어 이 가정은 그런대로 그냥저냥 유지될 듯하다.


언젠가 남편 상식이 퇴직을 하고 부부가 둘이 덩그마니 한 집에 있는 날이 찾아온다면 그때는 서로 방 하나씩 차지하고 들어앉아 서로 각자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하며 최대한 마주치지 않고 '나는 솔로'로 지내리라. 어차피 사람은 혼자이고, 늙을수록 혼자 사는 연습이 필요할 테니까. 우리는 모두 솔로이지 않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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