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점심을 먹고 교무실 자리로 돌아왔다. 늘 그렇듯 유선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무선보다 불편하지만, 이건 나만의 신호다.
"지금은 말 걸지 마세요."
말하지 않아도 이어폰이 대신 말해준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의 부름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나는 이곳에 있지만, 동시에 내 세계 안에 있다.
음악에 집중하려던 그때, 익숙한 알림음이 울렸다.
“카톡.”
‘아놔... 누구야. 내 신성한 점심시간을 방해한 사람은.’
평소엔 알림을 꺼두는데, 오늘은 깜빡하고 그냥 나왔던 모양이다. 무시하려고 했으나 이미 들은 이상 신경이 쓰인다. 결국 핸드폰을 들었다.
[선생님, 저 오늘 상담 요청해도 되나요?]
지안이었다. 우리반 반장이자, 항상 밝게 웃으며 친구들과 잘 어울리던 아이.
[지금 내려오세요.]라고 답장하자 곧,
[아! 지금은 그렇고… 오늘 방과 후 시간에 상담해도 될까요?]라는 메시지가 이어졌다.
순간 멈칫했다. 지안이가? 무슨 일이지? 방과 후, 그것도 조용히 상담을 요청하다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
[잠깐만. 선생님이 회의가 있는데, 꼭 참석해야 하는지 알아보고...]
급한 상담이 잡혀 회의는 늦게 참석하겠다고 부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지안에게 다시 답장을 보냈다.
[오늘 방과후에 상담하자.]
[감사합니다.]
정중한 인사가 돌아왔다.
며칠 전, 점심시간. 복도 끝에 멍하니 서 있던 지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그녀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감정도 표정도 없이, 그저 눈물만 흐르던 얼굴. 말을 걸까 고민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그 눈빛은, 어떤 위로도 닿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마도, 지안이는 나를 봤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 아이가 나를 찾아왔다. 그날의 눈물과 오늘의 메시지 사이엔 분명 어떤 이야기가 있다. 나는 아직 그게 뭔진 모르지만, 오늘만큼은 그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들어줘야겠다.
6교시가 끝났다는 종이 울리고 나는 종례 시간에 지안이에게 청소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지안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청소도구를 들었다.
“자, 나머지는 반장이랑 선생님이 마무리할게요. 어서 집으로 가세요. 늦으면 같이 청소하는 거야!”
아이들은 누구보다 빠르게 교실을 빠져나갔다.
“이제 이야기해도 돼.” 나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고, 지안이는 가방을 무릎 위에 올린 채 깊게 숨을 골랐다.
“선생님… 저 사실은, 저 자신이 누군지 잘 모르겠어요.”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엔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는 눈빛으로 말을 이어가 보라고 격려했다.
“어릴 때… 초등학교 4학년 때 왕따를 당했어요. 이유도 없이 친구들이 절 멀리했죠. 그때부터 늘 무서웠어요. 다시 버림받을까 봐.”
그녀는 가방 끈을 꼭 쥐었다.
“그래서 지금도 친구들한테 제 의견을 잘 말 못 해요. 그냥 다들 하는 대로 따르죠. 그래야 버림받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그늘진 무언가가 늘 비쳐 보였던 이유가 이제야 선명해졌다.
“근데요… 아무리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라도 제가 먼저 말을 안 걸면, 아무도 먼저 다가오지 않아요. 그게 너무 슬퍼요. ‘나는 존재 가치가 없는 걸까?’ ‘내가 애쓰지 않으면 어디에도 낄 수 없는 사람일까?’ 그런 생각만 들어요.”
지안이는 울지 않았지만, 그 말들은 교실을 조용히 채웠다.
나는 조용히 지안이를 바라보며, 오래전 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고등학생 시절. 나 역시 왕따를 당했고, 이후로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숨기며 조심스럽게 살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안이도, 지금 딱 그곳에 서 있는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안은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선생님, 우리 반에 어떤 친구가 있는데요. 저만 보면 손으로 코를 막고, 냄새난다는 표정을 지어요.”
나는 속으로 놀랐다.
‘이건 분명 학교폭력인데...’
하지만 지나치게 반응하면 지안이의 마음이 더 닫힐까 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 친구가 절 보면서 자기랑 친한 애한테 귓속말을 해요. 무슨 얘긴지 들리진 않지만… 저를 욕하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엔 친구랑 생일 선물을 주고받자고 얘기했는데, 그 애가‘너는 얘랑 선물 주고받고 싶니?’라고 말하며 지나갔어요…”
지안이의 고개가 점점 숙여졌고 목소리는 더 작아졌다.
“요즘은… 저랑 친했던 친구들조차 저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요. 모두가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무서워요. 밤에 잘 때도 그 얼굴들이 자꾸 떠올라서 잠이 안 와요.”
나는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아주 오래전 내 안 깊숙이 묻어두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 역시 그랬다. 이유도 모른 채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겨누던 시간들. 그저 조용히 작아질 수밖에 없었던 날들...
만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얼굴들이 익명 뒤에 숨어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단 한 사람만이 스포트라이트 아래, 홀로 서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리며 조용히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던 모습... 귓가에는 끊임없이 웅웅 거리는 소리가 가득했고, 머릿속에선 삐- 하는 경고음처럼 감각이 외쳤다.
“응급상황이야. 이건 위험해.”
세상이 나를 거부하는 듯한 느낌.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듯한 깊은 절망. 나는 그 감정, 그 외로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오래도록 꺼내지 않았던 내 과거가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잊은 줄 알았던 기억이 마음속에서 스르륵 스며들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지안이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로 붉게 물든 석양이 교실 바닥을 길게 가르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오래된 기억을 비추는 조명 같았다.
“어... 미안. 어디까지 이야기 했지?”
내 목소리는 아주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떨림이 있었다. 지안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사이에 흘렀던 침묵은, 이제 막 시작된 이야기의 예고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