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을 그친 지안이는 눈물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저 오늘 선생님께 말한 거, 다른 친구들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아 주세요. 특히 제가 힘들어한다는 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불안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지안이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보이는 아이에게 분명 주의를 줘야 하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다. 자칫하면 지안이의 상황이 더 악화될 수도 있었다.
며칠 뒤, 나는 반에서 나름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여학생을 따로 불러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우리 반 수업에 들어오시는 선생님들이 여학생들끼리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하시는데, 혹시 아는 것 있니?”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음… 이상하다고요?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요. 다들 잘 지내는 것 같아요.”
그 학생은 잠시 고민하더니 덧붙였다.
“아, 오히려 소은이가 요즘 좀 그렇던데요. 맨날 혼자 앉아 있거나, 단짝인 남자 사람 친구랑만 붙어 다녀서… 말을 걸고 싶어도 끼어들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진달까……”
여학생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반 아이들은 지안이가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안이의 불안감이 만들어낸 착시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며칠 뒤, 다시 지안이와 마주 앉았다. 나는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조심스러웠다.
“지안아, 선생님이 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과거에 좋지 않은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은, 작은 단서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돼. 마치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말처럼 말이야. 작은 솥뚜껑만 봐도 지난날의 자라가 떠올라 깜짝 놀라게 되는 거지.”
지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것 같아요.”
“네가 어릴 적 겪었던 왕따 경험은 너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겼을 거야. 그래서 지금도 아주 작은 행동이나 표정에도 네 과거의 경험이 떠올라 더 크게 아프게 느껴질 수 있어. 세상 모든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거지.”
나는 지안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혹시 지금 지안이가 겪고 있는 일도, 실제보다 네가 과하게 인지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지안이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네가 느끼는 감정은 진짜야. 그 감정이 틀렸다는 게 아니야. 다만, 그 감정의 크기가 실제 상황과 다를 수 있다는 거지. 만약 네가 ‘내가 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는 잠시 네 마음의 안테나를 끄는 연습을 해볼 필요가 있어.”
나는 지안이에게 작은 연습을 제안했다.
“친구가 코를 막는 행동을 했을 때, ‘아, 저 친구가 나를 싫어하는구나’ 하고 단정 짓기 전에, ‘혹시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거야. 그리고 그 생각을 멈추고 다른 것에 집중해 보는 거지.”
지안이는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지안이의 눈빛 속에서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여전히 아파하고 있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잠시 후, 지안이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더 참아볼게요."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지안이의 상처가 더 깊어질까 봐 걱정되었다.
“아니, 지안아. 안테나를 끄는 건 참으라는 게 아니야.”
나는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참는 건 네 마음속에 쌓이는 거야. 쌓이다 보면 결국 터지게 되고, 네가 더 힘들어져. 안테나를 끄는 건, ‘음, 그럴 수 있구나’ 하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이야.”
나는 지안이의 눈을 마주 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예를 들어볼게. 누군가 너를 보면서 귓속말을 해. 그럼 네 마음속 안테나가 켜지면서 ‘쟤네들 내 이야기를 하는 걸 거야, 어떡하지?’ 하고 불안해지겠지? 그때 잠깐 멈춰서 생각해 보는 거야. ‘그래, 내 이야기를 했다고 해. 그래서 뭐 어쩔 건데?’ 이렇게 생각하면 어때? 네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면, 그냥 안테나를 끄고 쿨하게 지나가는 거지.”
지안이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그럼 만약에… 너무 신경 쓰이면요?”
“그럴 땐 두 가지 방법이 있어.” 나는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첫 번째는 네가 직접 가서 불편하다는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는 거야. 예를 들어, ‘너희들 내 이야기하니? 나 앞담화 좋아한다. 뒷담화는 거절이야’라고 말하면서 싫다는 의사 표현을 정확히 하는거지. 가벼운 조크를 섞으면 좋고. 물론 이게 쉽지 않다는 건 알아. 선생님도 아직까지 연습하고 있는 중이야. 하지만 네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하는 연습은 꼭 해야해.”
“그리고 두 번째는, 네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감수할 수 없을 때야.”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우리 반 아이들이 너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친구들의 증언을 증거 자료로 사용하기는 힘들어. 그럴 땐 너를 괴롭히는 친구들이 찍소리 못하게 객관적인 증거 자료를 수집해야 해. 언제, 누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기록하고, SNS 메시지도 좋고, 정말 힘들면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도 도움이 돼.”
나는 녹음기의 이점을 설명했다.
“녹음을 하고 있으면 상대방이 너한테 이상한 말을 해도 화가 나지 않거든. 오히려 ‘아싸, 증거 자료 획득!’ 하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아이러니한 감정을 느낄 수도 있어. 그리고 녹음된 걸 다시 들어보면서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건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도 그 녹음본을 듣고 나랑 똑같은 반응을 보이면 ‘역시 네가 틀린 게 아니었군’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안도감을 얻게 되지.
지안이의 눈빛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이제는 이해와 고민의 빛이 섞여 있었다. 나는 지안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안아, 참는 거랑 받아들이는 건 달라. 참는 건 병이 되지만, 받아들이는 건 네가 상황을 통제하고 네 감정을 다스리는 힘이 돼. 네가 이 상황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온전히 너의 선택이야. 그리고 절대 잊지마 선생님은 언제나 지안이 편이고 지안이의 선택에 따라 선생님의 다음 행동이 결정될 거야.
나는 지안이의 눈빛을 보며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그리고 지안아, 선생님이든 부모님이든,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마음에만 담고 있으면 병나. 꼭 누구한테든 이야기를 해야 해!”
지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잘 고민해 볼게요.”
나는 지안이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래,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니?”
지안이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없어요.”
“그럼 가보세요.”
“네.”
지안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교실을 나섰다. 텅 빈 교실에 홀로 남은 나는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지안이의 이야기가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이들은 지안이가 힘들어하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지안이의 상처가 너무 깊어, 작은 자극에도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안이를 향한 ‘코 막는 행동’이나 ‘귓속말’이 아무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사소한 행동들이 지안이에게는 비수처럼 꽂혔을 테니까.
나는 교실을 둘러보았다. 이 아이들이 서로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반 아이들 전체에게 다시 한번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까? 특정 상황이나 개인을 지목하지 않으면서, 모든 아이들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게 만들려면... 내일 아침 조회 시간에 어떤 말로 이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할지, 나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