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2

by yuri

지안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오래전 깊숙이 묻어두었던 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고등학교 1학년. 나에게는 친한 친구가 있었다. 조용하고 다정한 아이였다. 그리고 또 한 명, 같은 반 친구. 정확히 말하자면 단순한 클래스메이트. 동급생. 딱 그 정도 거리였다. 늘 웃고 있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아이가 내 친구의 가방을 몰래 뒤져 일기장을 꺼냈다. 그리고 쉬는 시간, 반 아이들 앞에서 그 일기장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비웃는 소리, 낄낄대는 웃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은 같이 웃었다.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말했다.

“그건 좀 아니지 않아? 남의 일기장이잖아. 그만해.”

그 순간, 교실 안 공기가 달라졌다. 그 아이는 날 힐끗 쳐다보더니, 일기장을 닫고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나를 향한 분위기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말을 걸면 무시하거나, 엉뚱한 말로 되받아쳤다. 내가 지나가면 갑자기 조용해지는 무리. 처음엔 기분 탓이라 여겼지만,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그러던 중, 그 아이가 나아게 500원을 건네며 말했다.

“야, 매점에서 빵 좀 사다 줘. 친구끼리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우리는 친구니까, 그 정도 부탁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뒤, 그 아이는 500원을 주며 3000원어치 빵을 사 오라고 했다.

“오늘은 치즈케이크가 먹고 싶은데 돈이 좀 모자라네. 나중에 줄게.”

내가 거절하려는 눈치를 보이면 꼭 이렇게 덧붙였다.

“친구잖아. 친구끼리 이 정도도 못 해줘?”

나는 웃으며 넘겼다. 그냥 참았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고 믿고 싶었고, 모든 게 곧 예전처럼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그 아이가 말했다.

“커피 마실 거니까, 뜨거운 물 좀 떠 와.”

말투는 가벼웠지만, 그 안엔 분명한 '명령'이 있었다. 그 순간, 뭔가가 내 안에서 끊어졌다. ‘안 돼. 이대로 계속하면 안 돼.’

나는 일부러 학생용 정수기가 아닌, 교무실로 향했다. 선생님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 누군가 내 눈빛을 알아차려주기를 바라며, 천천히 걸었다.

다행히 한 선생님이 다가왔다.

“왜 여기서 물을 떠? 학생용 정수기 쓰면 되잖아.”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사실대로 말했다. 선생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와 함께 교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물었다.

“네가 마실 거면 네가 떠오면 되잖아. 왜 다른 친구에게 시켜?”

그 아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했다.

“제가 시킨 거 아니에요. 쟤가 해주겠다고 했어요.”

그걸로 끝이었다. 그날 이후, 그 아이의 괴롭힘은 더 조용하고 더 교묘해졌고, 아무도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내 가장 친한 친구(일기장을 빼앗겼던 그 친구)의 가방이 없어졌다. 우리는 반 아이들에게 묻고, 복도를 뒤지고, 교실을 샅샅이 뒤졌다. 그때, 그 아이가 태연하게 말했다.

“아, 그 가방? 나 아까 2층 여자 화장실에서 본 것 같은데...” 그리고 큭큭 웃었다.

우리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친구의 가방은 변기통에 처박혀 있었다. 젖은 교과서, 찢긴 노트, 망가진 필통.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그때 느꼈던 무력감은 지금도 생생했다. 나를 포함해 아무도 나서지 못했고, 그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희생양을 찾아 웃고 있었다. 마치 그 공간에 나만 홀로 고립된 듯한 기분이었다. 누군가는 눈을 감았고, 누군가는 귀를 막았다. 그리고 나는, 나 역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나를, 그리고 친구를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그 기억은 나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지만 동시에, 나는 그 이후로 다시는 미움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갔을 때도, 그리고 사회 초년생이 되었을 때도, 나는 늘 나를 숨기며 살았다. 누가 싫은 소리를 할까 봐, 조금이라도 분위기가 싸해질까 봐, 늘 타인의 눈치를 살피며 착한 아이가 되려 애썼다. 남의 비위를 맞추고, 내 의견보다는 모두가 좋아할 만한 답을 내놓았다. 싫어도 싫다고 말하지 못했고, 모든 사람에게 두루두루 잘 지내는 ‘무난한 사람’으로 비치길 원했다. 그렇게 하면 안전할 거라고... 그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몇 년 전, 나는 한 학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때도 나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 노력했다. 누군가에게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못했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동료 교사가 자신이 맡은 업무의 실수를 내게 뒤집어씌웠다. 명백히 그 사람의 잘못이었지만, 그는 교장 앞에서 모든 책임을 나에게 전가했고, 나는 제대로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내가 날카롭게 반응하면 모두가 나를 미워할까 봐, 싸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그저 침묵했다.

결국 그는 유유히 승진을 했고, 나는 그 일을 계기로 그 학교를 떠나야 했다. 억울함에 밤잠을 설쳤지만, 그 누구에게도 속 그날의 일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내 말은 아무도 안믿어 줄 거니까... 그렇게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던 나의 노력이, 결국 나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카페에서 그 학교에서 친냈던 선생님을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억울했던 그때의 일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지만,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생님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선생님,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는 없어요.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해요.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면, 결국 자기만 손해를 보게 돼요. 이제는 선생님 자신을 먼저 생각해도 괜찮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치 얼어붙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부터 조금씩 나를 바꾸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연습을 했다. 때로는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조금씩 본래의 ‘나’를 찾아가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 지안이가 내 앞에 앉아 있었다. 과거의 나처럼, 타인의 시선과 미움 속에서 길을 잃고 자신을 지워가고 있는 아이.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안아, 선생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

나의 말에 지안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누군가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나를 멀리하는 것 같을 때, 세상이 나를 거부하는 것 같고 나 자신조차 미워지는 기분. 그게 얼마나 외롭고 무서운지 너무 잘 알아.”

지안이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지안이의 가방 위에 올려진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차가웠지만, 지안이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으면, 마치 내가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아. 아무리 노력해도 보이지 않고, 존재 가치조차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

지안이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나를 향했다.

“선생님… 정말요? 선생님도 그런 적이 있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래서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지안이의 눈을 보며 말했다.

“명심할 건 절대 네가 이상해서 이런 일을 겪었던게 아니야... 단지... 이건 어른이 되는 과정 중일 뿐이야. 절대 너 자신을 탓하지마...”

지안이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소리 없는 울음이었지만, 그 울음 속에는 그동안 억눌렸던 모든 감정이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지안이가 충분히 울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창밖은 이미 어둑해졌고, 교실은 지안이의 울음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지안이의 외로움이 나의 외로움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외면하지 않고,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어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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