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감독을 마친 다음 날이었다. 천근만근같은 몸을 이끌고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동료 선생님들을 보며 넋두리처럼 말했다.
“아니, 왜 우리 학교는 수능 다음 날 재량 휴업을 안 하는 걸까요? 학생들도 하루 종일 시험 치르느라 녹초가 됐을 텐데… 바로 다음 날 등교시키는 건 너무하지 않나요?”
다들 피곤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중 한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저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긴 한데요… 수능 다음 날 등교를 시키는 이유 중 하나가, 혹시 학생들이 시험을 망쳤다고 비관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봐... 학교가 안전망이 되어 주기 위해서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데 마음이 순간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능이라는 시험이 학생들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오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은 어른들은 쉽게 한다. 나 역시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다르다. 좋은 대학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누군가는 중학교 때부터, 심지어 누군가는 유치원 때부터 달려왔다. 주변의 기대와 압박, 경쟁 속에서 스스로도 모르게 스위치를 ‘성공’에만 맞춰 놓고 살아온 것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목표가 흔들리는 순간은, 인생 전체가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안다. 실패라는 경험이 오히려 큰 자산이 되고, 다른 길을 열어주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비 온 뒤 땅이 더 단단해지듯, 사람도 그런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성공은 달콤하고 좋지만, 인간을 단단하게 만드는 건 실패 쪽이다. 실패는 생각을 뒤집고, 나를 돌아보게 하고, 방법을 다시 찾게 만든다. 그 과정이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결국 그게 나를 구축한다.
나 역시 아직 모든 걸 다 아는 나이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삶을 떠올려 보면 이상하리만큼 불안하고 두려울 때 용기를 내어 도전한 결정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경우가 많았다. 상황이 완벽해서 도전한 적은 거의 없었다. 언제나 조금 부족했고, 조금 무서웠고,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 ‘일단 해보자’ 하고 한 발 내딛으면 의외로 길이 열렸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지금 좌절의 순간에 있는 사람에게도, 그 순간이 오히려 인생을 바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한 가지 방법만으로는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내기 어렵다. 누군가에게 잘 맞는 전략이 나에게는 전혀 맞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이 방법이 나에게 맞는지 아닌지는 스스로 해봐야만 안다. 해보지 않은 길 앞에서 미리 좌절하거나 겁먹지 않는 태도, 그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선택지는 생각보다 훨씬 많고, 그중에 나에게 맞는 길은 직접 발로 걸으며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p.s. ‘범 내려온다’가 유명해진 뒤부터 국악 수업에서 이 노래를 주제로 수업을 종종 했었다. 학생들도 좋아하고, 나도 신나서 수업을 하곤 했다. 그런데 올해 수능 언어 영역 지문에 이 곡이 그대로 등장한 것이다. 시험을 보고 돌아온 학생들이 교실 문을 열자마자 “선생님, 수능 문제 맞추셨어요!”라며 소리쳤다. 나도 모르게 “오, 나 작투 탄 거임?” 하고 괜히 우쭐해졌다. 물론 우연이지만, 그 우연이 꽤 기분 좋았다.
결국 잘못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꾸준히 밀고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시기와 운이 딱 맞물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중요한 건 조급해하지 않고, 자기 속도로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나아가는 일이다. 인생은 길고, 기회는 생각보다 자주 찾아온다. 그 순간을 잡을 수 있도록 계속 움직이는 것,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