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용어 중에 매몰비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매몰비용이란 이미 발생하여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말하는 것으로 기회비용과는 비슷한 듯 다른 말입니다.
너무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기 위해 1만원을 주고 영화 티켓을 구매했지만 실수로 그 티켓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영화를 보기 위해 1만원을 더 주고 영화티켓을 재구매하는 것이 맞을까요? 아니면 아무리 잃어버렸다고 하더라도 2만원을 주고 영화를 보는 것은 너무 비싸기 때문에 영화를 보지 않는 게 맞을까요?
인간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매몰 비용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지금 이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이미 써버린 돈, 시간, 노력 등의 "매몰 비용"이 아깝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더 깊게 집착합니다.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1만원이던 2만원이던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영화라면 '이미 엎질러진 물 어쩌겠어…'하고 영화를 보러 가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잃어버린 영화 티켓을 찾아 헤매다가 영화를 보지 못하거나 "2만원은 너무 비싸다… 기다렸다가 나중에 OTT에 뜨면 보지…"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이를 매몰비용의 오류라고 합니다.
한국은 엘리트 교육에 익숙하여서 그런지 음악가가 되려면 예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후에 유학을 가는 게 당연한 코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명 음악가들 중에는 의사나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음악에 눈을 떠 음악가로 제2의 인생을 사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은 출판업에 종사하는 저술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문학적 재능이 탁월해 어려서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1828년에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습니다.
슈만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비르투오소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니콜로 파가니니의 연주를 보고 법학을 그만두고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당대 최고의 음악 교사였던 프리드리히 비크 교수의 문하로 들어가 음악 공부를 시작합니다.
슈만이 처음부터 작곡가의 길을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는데 늦게 시작한 만큼 열심히 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손가락에 특수 장치를 사용하여 매일매일 연습에 매진했습니다.
TMI지만 다섯 손가락 중에 가장 약한 손가락이 4번째 손가락입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씩 꼽아서 접어보면 엄지, 검지, 중지까지는 비교적 손가락들이 힘 있게 움직이지만 중지를 접는 순간 약지 손가락은 이미 반쯤 접어져 있습니다. 힘도 제일 없습니다. 피아노는 10개의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악기입니다. 다시 말해 10개의 악기를 하나의 악기로 구현해야 되기 때문에 손가락 하나하나가 고르게 힘이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신체구조상 4번째 손가락은 힘이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때문에 피아니스트들은 이 4번째 손가락 힘을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슈만 역시 그랬는데 1832년 그는 네 번째 손가락 힘을 키우기 위해 사용한 특수 장치 때문에 손가락에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고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접습니다.
다행히 글솜씨가 좋았던 슈만은 곡을 썼던 경험을 살려 평론가 겸 작곡가로 활동합니다.
추후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지만 헥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도 원래는 의사가 되기 위해 의학을 공부했으나 음악이 너무 좋아 후에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양방언 작곡가의 <프론티어(Frontier)>라는 곡을 좋아합니다. <프론티어>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공식 주제가로 선정된 곡이기 때문에 연배가 있으신 분들은 듣자마자 "아! 이 곡"하실 겁니다.
양방언 작곡가 역시 본업이 의사였습니다. 의사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아버지, 형, 누나 모두 의사, 약사였습니다. 음대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집안 분위기상 의대에 진학하게 됐고, 아버지는 음악만으로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 어려우니 의사가 된 후에 음악을 하라고 조언했습니다. 1984년 대학을 졸업하고 국가시험 등을 거쳐 마취과 의사가 된 그는 2년 후 도쿄대 병원으로 발령받고 며칠 뒤 의국장에게 찾아가 의사를 그만두겠다고 통보하고 그 뒤로 음악가의 길을 걷습니다.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하다 보면 언젠간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노력했다면 내가 할 뻔했던 다른 길은 기회비용이 됩니다.
하이든은 목소리가 너무 예뻤기 때문에 카스트라토가 될 뻔했지만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이든에게 있어서 카스트라토는 기회비용이 됩니다. 하지만 하이든이 성악가가 되기 위해 들인 모든 노력들이 매몰비용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성악가 활동을 했기 때문에 하이든은 좋은 성악곡을 많이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치창조>는 헨델의 <메시아>, 멘델스존의 <엘리야>와 함께 3대 오라토리오로 손꼽히는 곡입니다.
무언가를 배우고, 연습할 때 들어가는 비용은 매몰비용 처리가 되어도 경험은 매몰비용 처리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경험을 해왔느냐에 따라서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비싼 옷, 비싼 가방과 같은 물질적인 풍요를 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부자들일수록 자녀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고 합니다.
어디서 읽었는데 해외여행을 가서 많은 기념품을 사는 사람들일수록 해외여행을 자주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해외여행을 자주 가는 사람들은 내가 그곳에 다녀왔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조그마한 소품만 구매한다고 합니다.
젊을 때의 얼굴은 유전의 영향이 크지만 나이 든 얼굴은 그 사람의 경험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온화한 표정을 지닌 노년의 얼굴을 만들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