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와 베토벤은 모두 프리랜서 음악가 생활을 했지만 베토벤에 비해 모차르트는 재정적 안정을 이루지 못합니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매우 소박하고 조용하게 진행됐으며 지금도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반면 베토벤의 장례식에는 약 2만 명에서 3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참석했고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인 1만 2천 플로린을 그의 조카인 카를에게 유산으로 남깁니다.
두 사람 모두 음악가 아버지에게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음악천재로 불렸지만 말년이 크게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차르트는 프리랜서 음악가로 활동하면서도 후원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항상 자신을 후원해 줄 돈 많은 귀족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반면 베토벤은 후원에만 의지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자신의 작품을 비싸게 팔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누군가의 후원을 받으면서 음악을 하게 되면 후원자의 요구를 반영한 음악을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후원자로부터 자유로운 음악을 만들 수 없습니다.
베토벤은 이를 타개하고자 공공음악회를 떠올렸고 이를 대중적으로 유행시킵니다.
공공음악회란 관객들에게 표를 팔아서 얻은 수익금으로 음악회를 여는 것입니다. 오늘날 콘서트를 처럼 티켓을 팔아 얻게 된 수익금으로 연주비와 무대 대관료 등을 충당합니다.
공공음악회가 자리 잡기 이전은 주로 궁정, 귀족 가문, 교회, 부유한 후원자들의 의뢰로 음악회가 이루어졌습니다. 때문에 대중이 아닌 특정 계층을 위한 공연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공공음악회가 활성화되면서 대중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음악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사람의 후원으로 음악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특정 한 사람이 거액의 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공연이 활성화되기 어렵습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씩 돈을 걷어서 공연을 만들면 양질의 공연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죠.
베토벤은 후원자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기보다는 자신의 음악적 세계관을 표현한 자기만의 곡을 만들길 원했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공공음악회는 후원자의 그늘에서 벗어나 창작의 자유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줍니다.
그에게 있어 공공음악회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대중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소통창구로서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베토벤의 사업성은 공공음악회 활성화뿐만 아니라 출판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는 출판을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내게 됩니다.
지금이야 영화 등을 통해 "전 세계 동시개봉"이라는 말이 익숙하지만 베토벤이 처음으로 이 아이디어를 냈을 때만 해도 매우 혁신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베토벤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곡가였기 때문에 한 나라에서 악보를 출판하면 불법 복제물들이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녔습니다. 이에 베토벤은 자신의 악보를 여러 국가에서 동시에 출판하도록 만들어 출판 지연으로 인한 불이익을 방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흑백요리사>가 인기를 끌면서 불법 스트리밍 사이트에 해당 영상이 풀려 넷플릭스가 큰 손해를 봤다고 하던데 베토벤 역시 불법 유통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것 같습니다.
베토벤은 출판사와 계약을 맺을 때도 여러 출판사와 동시에 계약을 맺어 출판사 간 경쟁을 유도하고, 자신의 작품을 먼저 제공하는 대가로 더 높은 선금을 요구하는 등 사업가로서의 기질을 보여줍니다.
베토벤은 평생 동안 그 누구에게도 고용되지 않은 독립적인 음악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프리랜서 음악가는 베토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 봅니다.
<아이디어 물량공세>(제러미 어틀리 페리 클레이반. 리더스북. 2022)라는 책을 읽는데 베토벤이 이렇게 창의적인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낮잠 덕분이라고 하더군요. 앞으로는 낮잠을 자는 아이에게 "넌 참 태병하구나"라고 뭐라고 할게 아니라 "창의적인 생각을 하기 위해 낮잠을 자고 있구나"라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창의적인 생각을 잘하면 큰돈을 벌 수 있으니까요. :)
베토벤은 음악적으로 큰 성공을 이뤘지만 평탄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1790년대 후반 2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청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1801년 의사이자 소꿉친구인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내 청력이 지난 3년 동안 계속해서 약해졌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1802년 베토벤이 그의 두 동생에게 보낸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에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은 고통과 그로 인해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베토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일부
1812년 베토벤은 사라져 가는 청각을 붙잡기 위해 보청기를 사용합니다. 그의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청력은 급속도로 나빠져 1818년 이후에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노트에 글을 써야만 했습니다. 필담 없이는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던 것이죠.
베토벤이 사용한 보청기
1842년 그는 완전히 청력을 상실했고 합창 교향곡 초연이 있던 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보낸 열광적인 박수를 제대로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 베토벤이 합창 교향곡을 지휘하는 장면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이후 그는 혁신적인 음악적 실험이 많이 합니다. 합창 교향곡 역시 그 실험 중 하나인데 원래 교향곡에서는 인성 즉 사람의 목소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토벤은 그 전통을 과감히 탈피해 교향곡 중간에 사람의 목소리를 넣습니다.
그의 음악 중 일부는 오늘날 현대음악의 관점에서 봐도 매우 혁신적이라 이해하기 힘든 곡도 있습니다.
전통적인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형식을 만들어냈으며 조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을 만들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청력을 잃기 시작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 스타일의 음악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베토벤 5번 교향곡 <운명>은 그가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기 직전인 1804년부터 1808년 사이에 작곡된 작품입니다. 첫 악장에 등장하는 운명의 동기(빰빰빰 빠~)를 보고 베토벤은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라고 말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빰빰빰 빠'는 노크 소리를 음악으로 표현한 것으로 운명 교향곡은 고통에서 승리로의 전환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음악가로서 완전히 들을 수 없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맞서 싸워나가겠다는 베토벤의 의지가 돋보이는 곡입니다.
요리사는 요리만 잘하면 될 것 같지만 식당도 운영해야 되기 때문에 사업가로서의 기질도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음악가 역시 곡만 잘 쓰면 될 것 같지만 내 곡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사업적 센스도 필요합니다.
베토벤이 성공한 음악가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적으로 그는 많은 트라우마와 어려움을 겪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