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배관공 이야기 - 삶의 원칙

by 문주성

내 뜰에 가을이 물러가고, 어느새 겨울이 불쑥 찾아왔다. 어제인 듯 오늘인 듯 말없이 빛을 더하던 가을과는 달리, 이 겨울이라는 녀석은 단번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는지 하얀 망토를 펄럭이며 성큼 다가왔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나는 인생을 통해 유독 겨울과 인연이 깊은 듯하다. 어린 시절 차령산맥 골짜기에서 자라며 눈은 일기예보보다 먼저 내리는 것이었고, 첫 외국 생활도 일본 동북지방, 그 악명 높은 눈의 땅에서 시작됐다. 시간이 흘러 내 의지로 선택한 이민지 역시, 춥고 눈이 많은 캐나다였다. 어쩌면 눈은 내 인생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실처럼 늘 따라다녔는지도 모르겠다.



그날도 평범한 하루였다. 설거지를 하던 중, 수압이 평소보다 강해졌음을 느꼈다. 알고 보니, 연수기로 인한 배관 문제를 지인이 고쳐주고 갔다는 소식을 아내에게 들었다. 고마움보다 먼저, 가장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앞섰다. 왜 나는 이런 것에 이리도 젬병일까.


배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불현듯 스물일곱 살 무렵, 일본에서의 어느 여름날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한 학교의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기숙사 건물은 오래전 회사 사택으로 쓰이던 곳을 리모델링한 것이었기에 외관은 멀쩡했지만, 내부는 자주 고장이 났다. 특히 배수 문제가 잦았다. 고헤이라는 일본 친구와 함께 살던 내 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끔 원인 모를 배수구 막힘이 발생했다.


그날도 샤워실 배수가 막혔다. 여름의 일본은 습하고 더워서 샤워는 필수였고, 매일같이 요리도 해 먹다 보니 배수는 생활의 중심 같은 것이었다. 아침 일찍 사감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학교로 향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니, 70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 배관공이 방 안에서 작업을 하고 계셨다. 물이 나오지 않아 뭘 할 수도 없었기에, 그의 작업을 자연스레 지켜보게 됐다. 다다미 위에 커다란 작업 지시서를 펼쳐 놓고, 하나하나 순서를 따라가며 체크하는 모습이 느릿하고 어설퍼 보이기까지 했다.


기숙사 친구들 말로는, 이 학교 배관공 중에 굉장히 실력 있는 분이 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는데, 그분은 휴가라도 간 건가? 이분은 초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작업 지시서를 일일이 확인하며 일을 하는 모습은, 마치 이제 막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어설퍼 보이던 작업은 어느새 마무리되었고, 막힘은 말끔히 해결돼 있었다. 공구를 정리하시는 그분께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아버지, 이 일을 얼마나 하셨어요?”


“오래됐지. 한… 54년 됐나.”


5개월도 아니고, 54년이라고?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그렇게 오래 하셨는데도 작업 지시서를 꼭 보셔야 하나요?”


그분은 천천히 웃으며 말씀하셨다.


“물론 토씨 하나 빠짐없이 외우고 있지. 하지만 기술자는 감에만 의지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란다. 매번 감으로 처리하다 보면, 어떤 날은 잘 되겠지만 어떤 날은 실수하게 되지. 기본으로 돌아가 하나하나 점검하고, 순서대로 해 나가면 어떤 문제도 결국 풀린다네.”


그리고는 내 눈을 바라보며 한마디 더 건네셨다.


“젊은이, 인생이 막히고 힘들 때는 조바심 내지 말고, 원리와 원칙으로 돌아가게. 그게 길이야.”



귀 안에서 커다란 종이 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말은 내게 ‘삶의 기술’로 새겨졌고, 지금까지 살아오며 수없이 떠올려졌다. 물론 바쁘게 살다 보니, 중간에 잊고 헤맸던 순간도 있었다. 그로 인해 경제적인 손해를 본 적도 있었고, 조급함에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나는 편견에 사로잡힌 채 눈앞의 모습만 보고 판단했던 미숙한 청년이었다.

지금도 완전히 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분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하나의 등불처럼 자리 잡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그분이 너무 완벽하게 배관을 고쳐놓으신 덕에…

다시는 그분을 뵐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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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삶은 가끔, 뜻밖의 사람에게서 가장 깊은 가르침을 준다. 그 배관공 어르신처럼 말이다. 브런치에 이 글을 올리며, 오늘도 ‘원리와 원칙’ 속에서 나아가려는 당신에게 이 이야기가 작은 빛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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