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십 년을 곁에 두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 어떤 이는 단 몇 분의 만남만으로도 가슴 한편에 오래 남는다. 오늘은 그런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그날은 초겨울이었다. 이름은 ‘초’ 겨울이었지만, 캐나다의 겨울은 결코 포근하지 않다. 매섭고 거센 바람과 함박눈이 도로를 삼키던 날,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말했다.
“새로 오신 분이 호텔 커피숍에서 일하고 계세요. 우리 응원차 한 번 다녀와요.”
거리도 멀고 길도 험했지만, ‘응원’이라는 말이 마음에 닿았다. 이민 생활의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나도 함께 길을 나섰다. 커피숍은 집에서 한 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 있었다.
첫 만남은 언제나 조금은 어색하다. 낯선 공간, 낯선 사람, 서로 다른 삶이 조심스럽게 엉켜드는 기분. 그날도 그랬다. 커피숍 문을 열자, 그는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짧은 머리칼이 인상적이었다. 미남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묘하게 단단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말투, 손짓, 눈빛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우리가 나눈 대화는 고작 2~3분. 커피는 썼고, 가격도 비쌌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지만, 만약 그날 이불속에서 하루를 보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따뜻한 인상이 마음에 남았다.
신기하게도, 그 짧은 만남 이후로 내 마음 한편에 그가 자꾸 맴돌았다. 그래서 다음 날, 혼자 다시 커피숍을 찾았다. 이번엔 비교적 긴 대화를 나눴다.
그는 단지 커피를 따르던 사람이 아니었다. 마음을 다해 삶을 응대하는 사람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고민하고, 캐나다에서 가장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이민자의 얼굴이었다.
그는 커피와 관련된 일을 오래 해왔다고 했다. 원두를 수입하고 분석하는 회사에 근무하며 세계 각지를 돌았다고. 하지만 캐나다에서 커피에 대한 월등한 지식이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사업적 성공이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몸담고 있는 오일필드와 ‘보일러메이커’라는 직업을 소개했다. 결코 화려하진 않지만, 기술과 인내가 필요한 일. 한국에서는 여전히 편견에 가려져 있지만, 캐나다에서는 존중받는 직업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직업을 말로 설명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낯선 사람에게 낯선 직업을 설명하는 일. 결국 나는 A4 용지 6~7장 분량의 글을 정성껏 써서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혹시 내가 강요한 걸까? 관심이 없는데 부담을 준 건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몇 달 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사님, 저 오늘 영주권 받았습니다. 이제 뭐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그제야 알았다. 그는 내가 글 마지막에 적어둔 “영주권을 먼저 취득해야 합니다”라는 문장을 가슴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말 없던 시간은 무관심이 아니라, 기다림과 준비의 시간이었다.
그 후 그의 삶은, 마치 누군가 설계라도 한 듯 빠르게 흘러갔다. 그는 어프렌티스로 일을 시작했고, 성실하게 기술을 익혀나갔다.
그리고 3년 뒤, 작년 12월 24일.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집사님, 저… 저니맨 시험 합격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이 났다. 말없이 그가 흘린 고생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그 3년 동안 그는 자라났고, 단단해졌으며, 웃음 속에 담긴 삶의 무게를 견뎌냈다.
그리고 늘 나에게 말했다.
“저는 요즘 참 행복해요.”
그 말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행복에 내가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오래도록 따뜻하게 했다.
나는 그를 별이라 부르고 싶다.
어두운 하늘에서도 묵묵히 빛나는,
자신만의 시간을 기다리며
언젠가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내는 별.
그 별 하나를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삶은 참 따뜻하다.
그 뒤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역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인생의 경로를 바꾸어 그 길에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