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도화지에 그린 첫날의 기억

럭스텍 이야기 4

by 문주성

낯선 시작이었다.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된 럭스텍과의 인연은 며칠 뒤, ‘첫 출근’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전임자와 단 하루도 함께할 수 없었다. 삼성 전략기획본부에 합격한 그가, 발령이 IMF 여파로 잠시 보류된 사이 럭스텍에서 일하게 되었고, 마침내 본사 발령이 떨어져 급히 떠나야 했다고 했다.


그의 서류를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일본 와세다대학 졸업에, 토익 980점. 단순한 인재가 아닌, ‘인재 중의 인재’였다. 그가 잠시라도 럭스텍이라는 작은 프로젝트팀에 몸담았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그런 그의 후임으로 내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어학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상대방이 몇 마디만 해도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내가 만난 한국인 중 가장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입사한 곳은 포스코 관련사의 프로젝트팀으로, 광통신 부품을 국산화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나는 그 팀의 다섯 번째 구성원으로 합류한 것이었다. 입사 전 느꼈던 ‘공공기관 같은 분위기’는, 어쩌면 팀의 구조에서 오는 인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첫 출근 날, 사무실에는 설계를 담당하는 박 과장과 나뿐이었다. 박 과장의 말로는 기술이사가 팀의 핵심인데, 해외 출장을 떠나 면접에도 출근 첫날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했다.


알고리즘을 짜는 손 대리는 점심에 출근해 새벽에 퇴근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고, 회계와 관리를 맡은 최 과장은 아직 포항에서 올라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중요한 미팅을 일주일 앞두고 퇴사한 전임자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급히 뽑힌 인물이었던 것이다.


내 책상 위에는 광통신 관련 영문 서적과 기술 자료가 높다랗게 쌓여 있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 투성이었다. 사무실 벽면에는 회사의 비전과 계획이 각종 그래프로 빼곡히 붙어 있었다.


박 과장은 내게 말했다.

“우리는 3년 안에 직원 300명, 매출 1000억, 그리고 상장을 계획하고 있어요. 그러니 Mr. 문의 역할이 아주 중요해요. 꼭 이사님을 잘 보필해서, 이 꿈을 함께 이뤄주세요.”


그 말을 들으니 마치 ‘반지의 제왕’ 속 반지원정대에 합류한 것처럼 마음이 두근거렸다. 신나는 모험이 시작된 것 같았다.


책상 서랍을 열자, 놀랍게도 면접 결과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줄곧 내가 유일한 지원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총 11명이 면접을 보았고, 나는 2등이었다. 내 점수는 생각보다 높았고, 객관적으로는 5~6등 정도가 어울린다고 생각했기에 의아했다.


어떻게 1등을 제치고 내가 입사하게 되었을까? 그 질문은 1년 뒤, 동경 출장을 갔을 때 사장과 부사장에게 직접 물어보게 되었다.


“당시 일본어도 잘하고 사회 경험도 많은 분들이 지원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저를 뽑으셨나요?”


두 분은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그랬지. 일본어도 유창하고 경력도 풍부한 사람들 많았어. 하지만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새로운 도화지에 우리가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그런 사람. Mr. 문을 보는 순간, ‘그래, 이 사람이다’ 싶었지. 우리가 찾던 흰 도화지라고.”


그렇게 나는, 럭스텍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이 그리려던 그림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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