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스텍 이야기 20(마지막 회)
럭스텍을 퇴사한 뒤, 며칠 간격으로 낯선 전화가 걸려왔다.
한 사람은 인천 남동공단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이었고, 또 한 사람은 명함에 ‘SK상무’라 적혀 있었다.
머리도 식힐 겸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남동공단을 찾았다. 공장은 막 성장의 탄력을 받는 듯했고, 직원들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사장실로 안내되자 회사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들은 향후 회사의 주력 아이템으로 럭스텍이 국산화한 제품을 고려 중이라 했다.
내 퇴사 소식을 접하고, 마침내 직접 부른 것이었다.
그들은 믿고 있었다. 기계만 들여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고.
그리고 그 정보를 내가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회의를 하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다.
눈빛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제시받은 급여는 럭스텍의 두 배.
예상치 못한 스카우트 제안이었다.
나는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며칠 뒤, 을지로 어디쯤이었던가.
SK상무는 은퇴 후 벤처기업을 준비 중이라며 나를 찾은 곳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럭스텍이 만든 제품이 지금 ‘뜨는 아이템’이라며 이야기를 청했다.
그와 함께 앉은 동료들의 눈빛엔 기대가 묻어났다.
잠시 고민했다. 시장분석을 해주고 자문료를 받을 수도 있었고, 상황에 따라 그들의 회사에 핵심요원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만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나는 두 시간 동안 차분히 이야기했다.
내가 직접 경험한 광통신 업계의 현실, 한국 기술의 수준, 투자 대비 수익 구조, 그리고 다가올 시장의 조짐들까지.
럭스텍의 흥망을 지켜본 나는,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200만 원이 들어 있는 봉투를 건넸다.
그들도 이제야, 이 시장의 위험성을 조금은 감지한 듯했다.
하지만 남동공단의 사장은 여전히 절박했다. 계속 내 주변에 맴돌았다.
이사직을 제안받기도 했다.
나는 아직 서른두 살, 사회생활은 겨우 3년 남짓.
그런 제안을 받는다는 건 분명 영광이었다.
그와 몇 차례 술자리를 함께하며, 그가 성실하고 단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솔직하고 싶었다.
돈을 원했다면, 그와 그의 회사가 어떻게 되든 내 이익을 챙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의 성실한 인생이 허망한 실패로 끝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투자하지 말 것을 권했다.
그즈음, 럭스텍 부사장도 나를 불렀다.
그 역시 독립을 계획 중이었다.
“문 팀장이 함께해 주면, 우리가 하던 그 아이템으로 새 회사를 세울 수 있어.”
그는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 우리, 한 달쯤 미국 여행이나 하자.”
웃음이 나왔다. 세상이 미쳐 있었다.
거품이 꺼지기 직전, 사람들의 광기는 그렇게 표출되었다.
만약 그들이 정말 투자를 했다면?
SK상무는 은퇴자금을 날렸을 것이고,
남동공단 사장은 평생 일군 회사를 잃었을 것이다.
럭스텍 부사장 역시 자금과 명예, 사람들 모두를 잃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거품은 꺼졌다.
내가 알던 회사들 대부분은 문을 닫았다.
그곳에서 일하던 수많은 청춘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중 누군가는 무너진 벽을 뚫고 벤처기업 회장으로 우뚝 섰지만,
대부분은 조용히 무대 밖으로 퇴장했다.
이민 오기 전, 내 발걸음은 다시 그 공장 앞에 닿았다.
문은 녹슨 쇠사슬로 굳게 잠겨 있었고,
“새 주인을 찾습니다”라는 팻말이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한때 반짝이던 조형물은, 잡초에 뒤덮여 흉물처럼 변해 있었다.
마치 삶의 한 여정처럼,
럭스텍은 그렇게 조용히 퇴장했다.
그들이 그리고자 했던 흰 도화지의 그림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민첩하게, 기민하게 정보를 전하고 대처했다면,
럭스텍의 몰락을 막을 수 있었을까.
한편으로 나는 럭스텍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한 회사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한 사람 한 사람과 교류하며,
삶과 선택, 그리고 사람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글에선 길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곳에서 지금의 사랑하는 아내를 만났고,
결혼까지 했다.
그러니, 어쩌면 럭스텍의 최고의 수혜자는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
사랑했다, 나의 럭스텍.
그리고 고맙다.
나는 너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