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명화 2
어릴 적 우리 집 안방에는 시간을 거스르는 장치 하나가 놓여 있었다. 리모컨도 없이 손으로 다이얼을 돌려야 채널이 바뀌던 낡은 텔레비전. 화면은 자주 흔들렸고,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밤의 정적을 가르곤 했다.
토요일 밤 열한 시, ‘토요명화’의 시그널 음악이 흐르면 나는 마치 금지된 성소에 들어서는 사람처럼 조심스레 안방 문을 열었다.
낮잠처럼 몸을 뉘인 아버지와 깊이 잠든 어머니의 숨소리 사이에서, 나는 숨을 죽인 채 TV 앞에 앉았다.
볼륨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추고, 빛과 표정, 화면의 떨림을 눈으로 읽었다. 그날 밤, 내 어린 세계를 조용히 뒤흔든 영화가 바로 **〈정오부터 세 시까지〉**였다.
영화는 은행 강도 그레이엄 도르시가 우연히 한 과부의 집에 머물게 되며 시작된다. 정오부터 세 시까지, 단 세 시간. 낮은 햇살이 거실을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동안 두 사람은 세상의 규칙을 잠시 내려놓는다. 이름을 부르고, 웃고, 서로를 바라보는 그 짧은 시간은 그들에게만큼은 삶 전체보다 밀도 높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어린 내 마음에 오래 남은 것은 그 사랑 자체보다, 그 이후의 이야기였다.
그레이엄이 떠난 뒤 여주인공 아만다는 그들의 만남을 글로 남기고, 그 기록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단 세 시간의 사랑은 ‘세기의 로맨스’로 포장되어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 다닌다. 진실은 이야기로 정제되고, 이야기는 신화로 굳어진다.
비극은 그레이엄이 감옥에서 돌아오며 시작된다. 살아 돌아온 그는 자신이 바로 그 전설 속 인물이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 완성된 이야기를 원할 뿐, 눈앞의 초라한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두 사람이 머물던 고요한 저택은 관광지가 되고, 가이드의 설명이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진다.
그레이엄은 자신의 이름이 신화로 굳어버린 공간을, 이방인처럼 서성인다.
그 장면은 묘하게 서늘했다. 살아 있는 진실이 박제된 이야기 앞에서 밀려나는 순간. 나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세상은 언제나 사실보다 이야기를 사랑하고, 진짜보다 잘 포장된 기억을 더 쉽게 믿는다는 것을.
영화가 끝났을 무렵, 시계는 이미 두시를 넘기고 있었다. 나는 불을 끄고 방을 나서며 부모님의 낮은 숨소리를 다시 들었다. 성인이 되어 그 집을 다시 찾았을 때, 안방은 기억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좁은 공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삶을 겹겹이 견디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또렷이 느껴졌다.
영화 속 그레이엄의 사랑이 활자로 박제되어 길을 잃었다면, 나의 기억은 손으로 돌리던 낡은 다이얼의 감촉처럼 투박하지만 살아 있다. 흔들렸기에 더 선명하고, 완벽하지 않았기에 오래 남았다.
이제 내게 **〈정오부터 세 시까지〉**는 단순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진실이 전설로 변하는 과정의 쓸쓸함에 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나만은 끝까지 붙잡고 있는 기억의 가치에 대한 은유다.
정오부터 세 시까지의 햇살은 사라졌지만, 그 빛을 기억하는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조용히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