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지난 탓일까? 다소 더위도 살짝 눈치를 보고 뒷걸음질 치는 듯하다. 저 멀리 가을도 살금살금 한 걸음씩 다가오고. 건들장마다. 비가 오다가 개고 또 비가 오다가 그친다. 바다나무 정원의 풀들도 꽃과 자리싸움 하느라 치열하다. 명당자리를 누가 차지할까 기싸움을 한다. 산소의 벌초에 이어 언덕배기의 무성한 풀을 대거 처단했다. 정원의 풀도 예외는 아니다. 주인에게 행사권을 넘겨주니 이방인 풀들은 나그네 되어 정원을 떠나갔다. 이렇듯 오전 전쟁을 치른 우리도 나그네 길로 떠나련다. 조그만 괴나리봇짐을 매고.
대단한 비가 아니기에 드라이브 삼아 길을 나섰다. 때론 햇볕 쨍쨍 인 날보다 이런 날도 꽤나 운치 있다. 한적한 평일 오후의 도로는 비 오는 날의 감상을 즐기기에 충분하다. 앞산의 운무도 산등성을 넘어 어디론가 길 떠나고. 너도, 나도 모두 내 길 떠남에 동행한다. 외롭지 않은 길 나섬이라 다행이다. 오늘은 신라와 백제의 사신을 근심스러운 마음으로 떠나보내며 송별하는 삼국시대의 국경지대로 향해본다. 거창의 "수승대"이다. 당초의 이름은 "수송대"였으나 조선시대 퇴계 이황선생이 아름다운 풍광과 어울리는 이름으로 개명제안을 하여 "수승대"로 불리었다고 한다.
맑은 물과 바위, 노송이 어우러진 거북모양의 거북바위는 계곡 중간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오랜 세월 풍파 속에서 굳건하게 지켜온 소나무의 모습이 위대해 보인다. 마치 소나무가 평지 위에 서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거북바위는 보는 위치마다 각기 느낌이 다르다. 바위둘레에 풍류객들의 글들이 새겨져 있는 걸 보면 뭇 선비들이 이곳을 지나가면서 너른 바위에서 잠시 시름을 놓았을 것 같다. 흐르는 물을 보고 시 한수를 읊으면서. 돌, 물, 나무가 어우러진 자연풍광이 그야말로 절경이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이 지역 주민에게는 아마 자랑스러운 관광명소일 것 같다. 이곳에는 요수정, 관수루, 구연서원들의 볼거리가 있다. 한 바퀴 돌다 보니 어느새 비가 멎었다. 잠시 목마름을 지역의 시니어클럽에서 운영하는 카페에서 시원한 팥빙수로 달래 본다. 내 시름도 달콤함에 녹여본다.
수승대를 나오며 수승대 출렁다리로 갔다. 지상 50미터의 높이에 200미터 길이의 높고 긴 다리이다. 드높은 산세와 떠다니는 운무, 발아래 흐르는 계곡물은 다리만 건너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은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반쯤 가다가 아득한 아래를 보는 순간 아찔하여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내려다보지 말걸. 고소공포증이 느껴졌다.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용기를 내고 갈 것인가, 돌아갈 것인가? 갈등을 느끼는 순간 눈치를 챈 짝꿍이 먼저 돌아서 주었다. 나머지 반은 나중에 수승대 쪽에서 걸어오자고. 그렇다. 이 길은 수승대부터 데크길로 연결된 트레킹코스로 작년에 완성된 관광코스였다. 미련 없이 날씨 탓으로 돌리며 간신히 체면유지를 했다.흔들 다리를 건널 땐 절대 아래를 보면 안 될 것 같다. 전설의 고향에서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거창은 대한민국의 넓고 큰 밝은 들에서 유래했다는 이름만큼 온유한 힐링도시다. 몇 년 전 수질을 정화시키는 창포를 식재하여 아름다운 생태공원으로 만들어진 창포원을 다녀가면서도 그 아름다움에 취했었다.그로인해 대한민국도 구석구석 좋은 곳이 많다고 느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지역적으로 가야산, 덕유산, 지리산 국립공원을 끼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 산수가 유독 아름답다. 오늘 가본 수승대와 출렁다리도 참으로 풍광이 멋진 곳이다.
역시 나서서 길을 걷고 나면 당연하게 따라오는 건 배고픔이다. 그건 양심도 체면도 없다. 그저 얼굴에서, 배에서 신호를 보내면 거부할 수 없는 몸짓으로 응수해야 한다. 산양산삼으로 숙성시킨 생선을 화덕으로 구워 준다는 생선구이집으로 갔다. 평일이고 날씨도 오락가락한 상태라 그런지 한가했다. 주말에는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당일 사전예약은 받지 않는다고 한다. 대기등록 예약시스템(테이블링)을 해야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별로 달갑지 않은 시스템이지만 먹고살려면 이용해야 한다. 오늘은 사람이 많지 않아 바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생선구이는 고등어, 바닥대구, 전어등 제철생선과 돌솥밥, 게장류 반찬으로 이루어진 한식 식당으로 깔끔하다. 따뜻한 돌솥밥 누룽지를 먹고 나니 배부름과 함께 여유가 생겼다. 나이가 먹긴 먹었나 보다. 출렁다리의 긴장감이 이제야 해소되다니.잠시 후 손님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왕 나섰으니 보고, 먹고 다음 행보인 마실 것을 향해 장소를 이동했다. 브런치가 내게 맡겨준 소임이 있기에. 최소한 거창의 맛과 멋을 따라 나그네 길을 떠나 왔다면 들러야 한다. 도착한 곳은 넓고 예쁜 허브카페다. 월성계곡을 따라 커다란 정원에 아기자기한 소품과 어우러진 꽃, 연못, 허브정원 등 볼거리가 많은 야외카페다. 한 바퀴를 돌며 구경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커피의 맛 끝에 허브향이 감도는 허브커피와 함께 흐르는 계곡물을 보며 물멍으로 여유를 부려본다. 약하게 오는 비가 또다시 가을을 재촉한다. 제법 선선하다.
요즘 집을 나서면 어디 가나 펜션, 식당, 카페가 여행의 대명사처럼 다가든다. 어쩌면 그것은 살아온 삶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간파한 탓인지도 모른다. 오늘 일상의 작은 쉼표 하나를 찍기 위해 가볍게 나선길이 거창한 여행길이 되었다. 거창군의 캐치프레이즈처럼.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어느 날 나도 모르게 갑자기 주어진 여행분야크리에이터라는 낯선 이름에 나름 소임을 다해 본다. 거창한 여행을 100번째 글로 브런치에 보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