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책에서 여우가 길들임을 원하며 이렇게 말한다. "네가 오후 4시에 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라고.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위해 의식이 필요하다고. 그 의식이라는 것은 어느 날을 평소와 다르게, 어느 시간을 평소의 시간보다 특별한 시간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이 구절들을 참 좋아하고 의미 있게 생각한다. 오늘은 제주살이에서 의식이 필요한 날이다. 설렘을 가지고 기다림에 행복한 특별한 날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3주 살이를 하는 동안 큰언니 내외가 오기로 한 날이다. 거기에 딸까지 온다고 한다.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보니 벌써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다. 당초는 두 명의 언니들이 오기로 하였으나 갑자기 작은언니가 일이 생겨 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큰언니도 오지 않겠다는 것을 극구 고집하여 형부랑 같이 오는 걸로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고 딸은 갑자기 휴무가 생겨 오게 된 예상치 못한 상황이지만 좋은 것을 우리끼리 먹고, 보고 한 것이 다소 신경 쓰였는데 잠시라도 다녀갈 수 있어 다행이다. 이제 사랑하는 가족들과 여행의 풍성한 의식을 치르리라.
나는 1남 3녀 중 막내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언니들의 보살핌을 지금까지도 받으며 살아왔다. 일욕심이 많고 몸이 약한 나는 혼자의 삶만을 추스르기도 어려운 어찌 보면 참 안쓰럽고 모자라는 사람이었다. 이런 동생을 언니들은 먹을 거며 좋다는 것을 늘 챙겨주었다. 맏이인 오빠가 일찍 돌아가시며 큰언니는 집안의 맏이역할을 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을 갔음에도 시댁과 친정을 위해 자신의 많은 부분을 희생하면서도 당연히 본인이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의 삶에 봉사와 헌신을 끌어안고 살았다. 이건 장남인 형부 역시도 마찬가지다.
형부는 오빠의 고등학교 친구이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부터 우리 집에 드나들며 곧잘 짐발이 자전거를 태워 주었다. 잘 생기고 멋진 오빠친구가 집에 오면 나는 기분이 좋았다. 자전거에 짐대신 나를 태워 신나는 동네구경을 시켜 주었으니까. 식구들이 모두 좋아하는 오빠친구는 어느 날 큰 형부가 되었다. 형부는 친구인 오빠가 뜻밖에 요절을 하였을 때도,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상주가 되었다. 건장한 형부친구들이 밤새 초라한 상갓집을 지켜 주어 오빠의 저승길도, 부모님의 황천길도 외롭지 않았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그런 형부가 늘 든든하고 의지가 되었다.
큰언니는 몇 번의 제주여행에서 시기가 어긋나 만나지 못한 유채꽃을 보고 싶어 했다. 나는 그 꽃을 황혼에 물들어가는 형부랑 언니에게 같이 보여주고 싶었다. 먹고 살만은 했지만 치매 시부모님을 모시고 있던 터라 언니와 형부는 편찮으신 부모님을 두고 함께 여행한다는 것에 대해서 본인들 스스로가 용납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긴 시간을 그렇게 각자 보내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여유가 있을 무렵 흘러가는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백내장으로 인해 형부가 눈수술을 하시면서 시력에 문제가 생겨 운전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여행에도 제약이 따랐다.
그동안 나도 내 삶을 살아가기 바빠 주변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이젠 마음도, 시간도 여유가 있으니 작은 고마움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올해 칠순을 맞이하는 큰 형부에게 제주여행이라는 작은 이벤트를 만들어주면 의미 있을 것 같았다. 내게 있어 형부는 오빠이자 또 다른 부모였던 것이다. 제주공항에서 큰언니와 형부, 그리고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도착한 작은딸을 픽업하여 의미 있는 여행길에 올랐다. 부모님께 다하지 못한 효도여행을, 부모님 역할을 다한 언니에게라도 하면서 내 그리움을 삭여 보련다.
우선 고기국수로 점심을 먹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제주에 오길 잘했다는 언니는 연신 탄성을 지르고, 바다를 바라보는 형부도 두 팔을 들어 환호한다. 에메랄드 빛 함덕해변을 끼고 서우봉 둘레길도 걸었다. 가는 길엔 유채꽃도 한창이다. 푸른 바다와 노란 유채꽃의 조화는 그야말로 환상이다. 나는 언니와 형부의 인생샷을 찍기 위해 계속 핸드폰을 눌렀다. 제주의 여행길마다 비켜갔다는 유채꽃을 오늘은 언니에게 한아름 안겨 주었다. 언니와 형부의 얼굴이 유채꽃만큼 화사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마농바게트로 유명한 베이커리에 들러 빵을 샀다. 늘 이곳을 지나면 들르는 곳이기는 하지만 줄을 안서는 날은 오늘이 처음이다. 매번 성수기에 관광을 한 탓이리라. 하나로마트에 들러 차 안에서의 먹을 한라봉과 제주 전통감귤한과인 과즐도 샀다. 제주 살기에서의 하나로마트 이용은 싱싱함과 저렴함으로 필수코스다. 짐을 풀고 잠시 쉬었다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동안 다이어트로 소식을 하던 딸이 선언을 한다. 제주도 여행 중에는 다이어트와는 안녕이라고. 흑돼지구이로 저녁 메뉴를 정했다. 언니와 딸이 머무는 3박 4일 동안 제주의 향토음식을 골고루 다 맛 보여 줄 예정이다.
작은딸의 네이버 맛집 탐색으로 숙소에서 가까운 고깃집으로 향했다. 역시 예쁜 야경으로 젊은이들의 눈길을 끄는 식당이다. 남편과 내가 볼 때 가성비는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지만 고기는 맛있었다. 연인들끼리 으스름 저녁에 야경을 즐기며 배를 채우기에는 아주 좋은 식당이다. 오늘은 기름기 있는 화롯불에 자매의 정을 불태워 본다. 오랜만에 만난 동서지간에도 술잔이 오고 가고 묵은 옛 처갓집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함께해서 행복한 시간들이다.
※ 혹시 모를 여행자를 위해 다녀온 장소를 기록해 본다.(삼대고기국수. 피플카페. 함덕해변. 서우봉 둘레길. 오드랑 베이커리. 하나로마트. 봉순이네 흑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