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급류의 뗏목 위에서 추는 춤과 같다. 계곡을 감싸 돌며 하류를 향해 사납게 내리 꽂는 급류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급류에 떠내려가는 뗏목의 방향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으리라. 급류 가운데인지, 좌안인지, 우안인지···· 흐름의 갈림에서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이쪽인지 저쪽인지 삿대질로 방향을 정할 수는 있는 것처럼.
흐름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나운 급류는 동력이 된다. 사공이 할 일은 뗏목 위에서 춤을 추듯이 상황에 맞춰서 삿대질로 물줄기를 살짝살짝 터치하는 일이다. 노를 저을 필요도 없다. 하류를 향해 내려가는 일은 급류가 알아서 한다. 단지 사공은 흐름에 따라 이쪽에서 삿대질 한 번, 필요하다면 저쪽에서 두 세 번 하면 된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물살의 박자에 맞춰 뗏목 위에서 춤을 추듯이 말이다.
청소년기는 상류이다. 계곡의 물살도 빠르다. 이 때의 춤은 프레스토, ‘매우 빠르게’나 비바체, ‘빠르고 경쾌하게’의 빠르기를 감당해야 할 것 같다. 상급학교 진학, 전공의 선택, 이성 관계, 부모님으로부터의 독립, 취업, 교우관계 등 연달아 나타나는 고비를 맞아 선택의 삿대질로 방향이 달라진다. 순간순간의 물살에 따라 자연히 사공은 순발력 있고 빠르게 춤을 추어야 한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있지 못하면 중간에 좌초할 수도 있다.
결혼한 후의 삶은 다소 안정적일 수 있다. 이때에는 비보, ‘힘차고 빠르게’에서 알레그로, ‘빠르게’를 거쳐서 알레그레토, ‘조금 빠르게’ 정도의 리듬으로 춤을 추어야 할 것 같다. 일찍 자리를 잡을 경우 모데라토, ‘보통 빠르게’의 빠르기로 바꿀 수도 있겠다. 뗏목 위 사공의 춤에 따라 뗏목의 안전과 방향이 정해진다. 춤을 잘 춘다면 암초사이 굽이를 돌며 위기를 비켜 하류를 향한 항진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중년에 들어서는 삿대질의 횟수도 많이 줄어 들것이다.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안단티노, ‘조금 느리게’에서 안단테, ‘느리게’의 속도로 흔들리지 않는 중후한 춤이 어울릴 것 같다. 급류를 헤쳐 나와 삶의 무게를 담아낸 자존감이 춤사위를 그만큼 여유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바다에 도착하기에는 아직 멀다. 뗏목 위에서의 춤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중간 중간 춤의 템포에 변화가 필요할 때이다.
중년을 넘어서면서 하류가 가까워졌지만 아직 춤을 멈출 때는 아니다. 아디지오,‘매우 느리게’같이 느리고 침착한 춤이 어울린다. 하류라고 급류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빠르고 느린 춤을 언제든지 출 수 있어야 한다. 동작은 빠르지 않지만 삶의 지혜로 춤은 부드럽고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 어울리는 춤동작이 필요할 때이다.
노년기 이후에는 라르고, ‘느리고 폭넓게’와 그라베, ‘장중하게 느리게’의 속도로 춤을 추며 생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 같다. 속도보다는 무게감으로 이웃과 후손을 위해 한 줌의 가치를 남겨야 하는 시기이다. 느리지만 폭넓게 감싸는 춤에는 삶의 흔적이 배어있다. 춤을 의식하지 않아도 움직임 그 자체가 춤이 되어 나타난다. 한 호흡, 한 발자국이 리듬에 맞춰 흐름을 타고 간다. 그렇게 춤과 내가 하나가 되는 시기이다.
이제 나는 중년을 넘어서 노년기로 들어서고 있다. 지난 세월 뗏목 위에서 제대로 춤을 추었는지 돌아보면 많은 아쉬움에 서글퍼진다. 빠른 속도로 힘차게 협곡을 내려올 시기에 뗏목 위에서 춤을 추기보다 흐름을 거스르려고 헛되이 애쓰던 일도 많았다. 프레스토와 비바체의 속도를 즐겨야 할 때 포기해야 할 일도 많았다. 그러나 흐름은 지금도 이어지고 뗏목 위의 춤은 아직 계속되어야 한다.
하류에 가까워진 지금 강의 폭과 깊이에 걸맞게 어울리는 춤이어야 한다. 포기하지 않은 삶의 대가를 건져야 한다. 서두를 일도 없다. 하지만 게을러서는 더욱 안 된다. 인연과 조건은 뗏목이고 달관(達觀)과 관조(觀照)는 그 위에서 추는 춤의 악보이다. 춤에는 균형이 필요하고,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제 악보가 조금씩 보일만 하니 저 멀리 하구가 나타나는 듯하다.
이것이 삶인가 보다. 다시 한 번 뗏목을 탄다면 그 때에는 스릴 있게 춤을 즐기며 내려올 것 같은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