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그림자는 눈빛으로 말려라

영화 - <마빈의 방>

by 낭만천사 유광영

제어하기 힘든 도식적(圖式的) 행동의 심층에는 힘들었던 과거에서 떠내려온 삶의 외침이 있다. 떠나지 못한 트라우마가 분노와 두려움의 틈새에서 해방될 날을 기다리며 몸부림치고 있다.


정서와 공감의 허락이 없는 규범적 접근은 또 다른 폭력이다. 입에 발린 교훈은 환영받지 못하는 잡동사니 세일즈맨일 뿐이다. 분노와 두려움에 젖은 그림자는 애정 어린 눈빛만이 말려 버릴 수 있다.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누구나 실천하지는 않는 일이다. 이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먼저 따뜻한 눈빛을 보내자. 젖은 그림자가 마른다.


엄마 때문에 부모가 이혼했다고 믿고 있는 ‘행크’는 아빠에 대해 막연히 동경하고 있다. 행크에 대한 엄마 ‘리’의 사사건건 간섭에 분노가 솟아 늘 반항하고 문제를 일으킨다. 서로 갈등하면서도 다가가고 싶은 애증(愛憎)의 관계이다.


행크의 방화로 집을 잃은 리와 작은 아들 ‘찰리’는 수녀원에서 더부살이하고 있다. 어느 날 20년 만에 언니 ‘베시’의 전화를 받는다. 백혈병에 걸려 골수 이식을 하기 위해서 맞는 골수 기증자를 찾기 위해서이다. 언니 베시는 20년 동안 병든 아버지 ‘마빈’과 고모 ‘루스’를 간호하며 독신으로 지내고 있다.


방화 사건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된 행크는 일주일의 외출을 허가받고 골수 검사를 받으러 리, 찰리와 함께 플로리다로 향한다. 행크와 찰리는 처음 만나는 할아버지와 이모에 대해 궁금해한다. 20년 만에 재회한 두 자매는 서로 안부를 물으며 서먹서먹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병들고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모습이 왠지 추하고 낯설어 보여 리는 아버지에게 선뜻 가까이 가지 못한다. 리는 은연중에 아이들 세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일 등 서운했던 마음을 베시에게 내비친다.


음악을 듣느라 차 안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행크에게 리는 당장 나오라고 고함을 지르는데, 베시가 가만히 차창 앞에서 환하게 미소 짓는다.


“안녕, 내가 베시 이모란다. 처음 봤지?

네가 얼마나 컸는지는 몰라도 이모를 한번 안아줘야지?”


행크는 직감적으로 그녀의 눈빛을 느낀다. 차 안에서 나와 기꺼이 베시를 안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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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를 둘러싸며 온 가족이 모이고, 베시는 차례로 가족을 소개한다. 갑작스럽게 많은 사람을 대한 할아버지 '마빈'은 행크가 인사를 하는 순간 발작을 일으킨다. 당황한 리와 행크, 찰리는 자리를 피한다. 이렇게 가족간 재회의 첫 분위기는 다소 어색했다.


리는 이모가 허락하기 전에 과자를 먹어서는 안된다며 대놓고 행크를 나무라고, 행크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방을 뛰쳐나간다. 리의 지나친 통제에 찰리도 눈치 보며 거북함을 느낀다. 이런 모습을 안타까운 듯 바라보는 베시…


할아버지의 발작과 고모의 잠꼬대 소리로 어수선한 분위기에 행크는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일어나 할아버지의 방에 보관된 잡동사니 물건들을 살펴보다가 공구 상자 하나를 발견하고 마당으로 들고나온다. 관심을 갖고 천천히 살펴보는데 베시가 다가와 행크에게 말을 건다.


공구에 마음이 가는 행크에게 그것은 할아버지 것인데 네가 가지면 좋아하실 거라고 베시가 말한다. 엄마와 달리 자신을 존중해주는 베시 앞에서 행크는 편안한 마음으로 조금씩 말문을 연다. 이에 고무된 베시가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행크는 단호히 그 손을 뿌리친다. 베시는 멋쩍고 당황스러워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간다. 미안한 듯 따라 들어온 행크는 베시에게 할아버지에 대해 묻는다.


할아버지는 라디오를 뜯어 놓기를 좋아하셨고, 행크의 엄마 리는 음악을 들으며 춤추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엄마와 쏙 빼닮은 낡은 사진의 여자는 할머니이다. 행크가 공구로 기계를 수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메리칸 탑 100을 모두 들을 만큼 노래를 좋아하는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내 안에 흐르는 가족의 피는 어쩔 수 없는 건가?


하지만 방어적이고 반항적인 틀 속의 행크는 말한다.


“난 검사를 안 받을 건데 어쩔거죠.”

“왜지?”

“이유는 없어요.”


행크는 공구 상자를 테이블에 던져 놓는다.


“이거 알아요? 사람들이 잘 해줄 땐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거예요.”

“그 말을 믿니?”

“이모가 날 보자고 한 것도 내게 바라는 게 있어서잖아요.”

“넌 내가 득이 되는 게 있어서 20년을 여기서 보낸 줄 아니?”

“당연하죠. 이모가 안 계셔도 요양원이 있잖아요.”


베시는 행크가 놓고 나간 공구 상자를 들고 행크의 침대 곁에 가서 놓느다.


“이거 네 물건하고 같이 놔둘게.”

“왜요?”

“네 거니까.”

“좋아요.”

“행크, 넌 내 조카야. 네가 어떻게 결정하든 난 널 사랑해. 잘 자라”


진정성 있는 베시의 눈빛이 행크에게 쬐어지면서 젖은 그림자는 조금씩 말라간다.


행크는 공구를 이용해서 고장 난 차고 문을 고친다. 베시는 행크를 칭찬하고 같이 드라이브 가자고 제안한다. 자동차에 관심을 보이는 행크에게 선뜻 운전을 맡기자 행크는 즐거운 마음으로 운전하여 바닷가로 간다. 바닷가에서 행크는 행크의 아빠에 관해 묻는다. 아빠에 대한 막연한 동경 또한 행크의 젖은 그림자이다.


베시와 행크는 마음을 열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차에 올라탄 행크는 갑자기 전속력으로 파도를 향해 악셀레이터를 밟는다. 바닷속으로 빠지기 직전에 핸들을 획 돌려 해안선을 따라 빠르게 속도를 올린다. 바닷물이 튀어 옷을 적신다. 베시는 짜릿한 스릴에 비명을 지르며 즐거워한다. 스릴은 남성성을 깨우고 마음을 정화시키는 의례(儀禮)이다. 둘은 연인같이 마주 보며 크게 웃는다. 갈매기가 호위하듯 앞뒤에서 날아든다. 행크의 옷은 젖었지만 그의 그림자는 조금 말라가고 있다.


의사로부터 골수이식을 받지 못하면 베시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얘기를 들은 리는 심란해진다. 두 자매는 만일을 위해 요양원 시설을 둘러본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고모를 돌보는 문제로 베시는 리와 크게 다툰다. 리는 20년 동안 자신을 찾지 않은 베시가 크게 서운했고, 베시는 20년 동안 아버지와 고모를 돌보았는데, 가족을 두고 떠난 리가 원망스러웠다. 여기에서 살면서 같이 아버지를 돌보자고 베시가 제안하자 리는 크게 화를 낸다. 자기는 혼자서 애들을 키웠고 이제 막 기회를 잡았다며 절대 이 기회를 놓지지 않겠다고 소리를 지른다. 이 때 행크가 나타난다. 상황을 눈치챈다.


리는 베시에게서 사랑했던 남자가 강물에 익사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평생 독신인 줄 알았던 언니에게서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자 리는 왜 자기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우리는 그 정도로 친하지 않았었다는 언니의 얘기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알지 못했던 사정을 알아가며 두 자매는 서로 연민을 느낀다.


리는 가발을 손질해 주겠다고 하다가 백혈병으로 머리카락이 빠진 언니 모습을 보고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마음을 추스르고 최신 유행에 맞게 정성껏 가발을 손질하여 준다. 새로운 스타일의 가발을 쓴 베시의 모습을 보고 온 가족은 박수치며 크게 웃는다.


다음날 모두 디즈니월드에 놀러 가서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음료수 마시고 침을 뱉는 행동, 전시된 장난감 총을 한번 쏴보는 사소한 일까지 리가 나무라자 행크는 반사적으로 반항한다. 엄마와 영화 본 기억은 없고 아빠와의 추억은 생각난다고 잡아떼는 행크에게 리는 아빠의 폭력성에 대해 자세히 알려준다. 행크는 이 또한 거짓말이라며 고함을 질렀지만 엄마의 이야기가 왠지 진지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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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시는 놀이기구 앞에서 리를 기다리다가 어지러워져 쓰러진다. 깨어난 베시는 리에게 잠을 자다가 다시는 못 깨어날까 봐 눈을 감는 것이 두렵다고 한다. 밤새 잠을 안 자려고 커피도 마시고 별짓을 다 한다며 흐느끼는 베시를 리가 다독거린다.


“알아, 언니는 괜찮을 거야. 뭐가 무섭다고 그래? 행크와 찰리가 있잖아. 잊었어? 언니는 괜찮을거야.”


베시는 월리 박사에게서 아이들 골수와 맞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는다. 리는 실수했을 수도 있으니 검사를 다시 해야 한다며 베시를 위로한다. 베시가 아버지를 돌보러 가려고 일어서는 순간 약병을 건드리면서 알약이 폭포수 같이 쏟아진다. 베시와 리는 함께 알약을 주워 담다가 눈을 마주친다.


“난 정말 복 받은 거야. 아버지와 고모를 모셨으니까. 그런 사랑이 있었다는게. 돌아보면 참으로 큰 사랑이었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게 너무 감사해”


리는 알약을 정리하다가 수많은 주사 바늘과 빽빽이 적힌 투약일정표를 보고 그만 질려버린다. 한시라도 여기를 뜨고 싶어진다. 급하게 짐을 캐리어에 싸고 있는데 행크가 나타나 어디 갈 거냐고 묻는다. 당황한 리는 부엌에 점심 준비하러 간다고 둘러댄다.


리는 수많은 약병 사이에서 어머니의 낡은 사진을 집어 들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가 마음을 잡고 투약일정표를 보고 하나하나 약을 챙긴다. 아버지의 식단도 함께 준비해서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간다.


베시는 아버지 마빈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손거울로 천장과 벽에 햇빛을 반사시켜 움직인다. 우리도 어렸을 적에 한 번쯤 해본 놀이다. 반사된 빛은 여기저기로 이동하며 모양을 만든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 마빈은 어린애처럼 즐거워한다. 베시도 같이 웃는다. 방 문 앞에서 리와 행크가 이를 흐믓하게 지켜본다.


부모와 고모를 간호하는데 평생을 바친 베시, 꿈을 안고 집을 떠나 이혼녀가 되어 힘들게 두 아이를 키우는 리, 지나친 어머니의 간섭과 통제로 반항아가 된 행크, 어머니의 위세에 눌려 온순하기만 한 찰리. 모두 과거에서 떠내려온 상처와 그림자가 있다. 무심코 살면서 같은 일을 반복한다. 베시도, 리도, 행크도, 찰리도…


분노와 두려움에 젖은 그림자는 애정 어린 눈빛만이 말려 버릴 수 있다. 상처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베시가 행크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조건 없는 포용이 필요하다.


“행크, 넌 내 조카야. 네가 어떻게 결정하든 난 널 사랑해. 잘 자라”


Donation은 Deal을 초월한다.

그리고 가족 공동체의 기본 구조는 Donation으로 이루어져 있다..

애정 어린 눈빛을 Donation 하자.

나는 이 영화를 이렇게 보았다.



개봉 : 1997.10.18.

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국가 : 미국

러닝타임 : 98분



- 낭만천사 유광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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