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따라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 마당 작은 꽃밭에 꽃씨를 가지런히 심었다.
꼬맹이였던 나는 아버지를 따라서 꽃씨를 흙 속에 잘 파묻고 토닥토닥 흙을 묻어주었다.
아버지가 나를 옆에 앉혀놓고 말했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그 때 하늘에 길게 꼬리를 그리며 비행기가 지나갔다.
나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 조종사라고 했던 것도 같고 선생님이라고 말했던 거 같고
다만 아버지께서 내게 해주신 말은 똑똑히 기억난다.
-세상은 넓어. 그러니 너는 외교관이 되어 더 큰 세상에 나가 세계를 무대로 자유롭게 살려무나.
- ?
아버지는 담벼락 너머 파란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들 아빠는 딸들에게 다 크면 시집이나 가라고 하던 시절인데 우리 아빠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건넨 한 마디는 가슴 속 깊숙히 씨앗을 뿌려 싹을 틔우고 울창한 나무로 자라났다.
최근에 친구와 만나 어릴 적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버지가 내게 해준 이 이야기를 했을 때 듣고 있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네 영화를 보고서도 느낀 거지만... 네가 어지간해서는 남들에게 굴하지 않는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건 네 아빠 덕분이야. 딸들의 자존감은 아버지에게 달려있대. 아버자와 딸과의 좋은 관계가 자존감 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대. 생각해봐. 어릴 적에 자기 아빠한테 외교관이 되어라 세계를 주름 잡고 살아라 외국에 나가라라는 말을 듣고 사는 딸이 몇 명이나 되겠어? 안 그래? 난 우리 아빠한테 그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아버지에게 지지와 사랑을 받은 딸들은 성인이 되어 남자를 만나고 상처를 받고 좌절할지언정, 자존감이 박살나는 경험을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대. 남들의 인정이 아닌 나는 나! 이 정도면 나 괜찮아! 라는 셀프 인정 마인드. 남들이 결코 훼손할 수 없는 단단한 멘탈을 가지고 있는 거래. 내가 널 볼 때마다 신기했던 게 바로 그 점이었어. 불우한 환경에서 단순히 콩가루 집안이기만 했으면 그런 자존감은 나오지 않아. 너네 아빠는 널 사랑한 게 맞아. 네가 아무리 아빠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혐오했을지언정 넌 그 아빠가 사랑한, 아빠를 똑닮은 딸이야.
돌이켜 생각해보니 유년 시절 아버지와 나는 관계가 좋았다.
아빠는 날 극장에 영화도 보러 데려가주고, 공원에 데려가 사진도 찍어주고, 함께 음악도 듣고, 나는 아빠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그때마다 아빠는 잘한다 잘한다 폭풍 칭찬을 해주었다. 아버지는 자식들 중에 당신의 쌍거풀 진 눈을 똑닮은 나를 편애했다. 그랬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나이들수록 느낀다. 내 외모 이상형이 아버지라는 것을. 아버지를 닮은 남성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것을. 아아,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구나. 흠모했구나.
내가 첫 영화를 만들고 상영을 했을 때 영화를 보러 온 아버지는 딱 한 마디를 하고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축하한다. 감독이 되었구나. 수고했다. 평상시 말수가 없는 양반이었다. 내가 뭘하든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하던 아버지였다. 가족을 불안과 공포에 빠뜨리고 가정을 도외시한 아버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기에 나도 무시한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 날 그 한마디에... 아버지가 날 인정했다는 생각에.....가슴 한 켠에 뜨거운 것이 짜르르 전류처럼 흘렀다.
ㅡ 세월이 흐르고 나는 그 때 아버지의 나이를 훌쩍 넘어섰다. 이제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아아, 세계를 주름잡고 살라는 건 아빠의 못 다이룬 꿈이었구나. 아버지 당신의 끝내 이루지 못한 한이었구나.
나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세계를 주름잡는 외교관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배낭 하나 메고 세상을 떠돌 수 있는 여행자가 되었으니 아버지의 소망이 다른 식으로 실현된 것일까?
2.
또 다른 어린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여섯살 때였던가. 동네에서 함께 놀던 동무들과 남산 타워까지 가기로 했다. 우리 모험대의 의기양양한 목표였다. 그런데 그만 장충단 공원 언저리에서 길을 잃었다. 산꼭대기에 늠름하게 서있는 타워가 바로 코 앞에 보이는데도 가도 가도 타워는 가까워지지 않고 열심히 앞으로 걸어가면 갈수록 딱 그만큼 멀어졌다. 이상했다. 도저히 닿을 수가 없었다. 배는 고프고 목은 마르고 몇몇 어린 애들은 주저앉았다. 울상이 되어 집에 가자고 어느 아이가 그만 울기 시작했다. 다들 겁을 먹었다. 하지만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주저앉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가고 싶었다. 그날 길을 잃어버린 우리들이 어떻게 무사히 귀가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이들 뒤를 따라 되돌아가는 길. 아쉬운 마음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자꾸만 자꾸만 뒤돌아봤다. 그 때 하늘에 붉디 붉은 저녁노을이 떴다. 남산 타워가 노을빛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풍경.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멈추지 않을 거라고. 난 다시 길을 떠날 것이라고.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꼭 알아 내고야 말겠노라고. 설령 길을 잃어버리고 주저앉고 두려울지라도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고 나는 앞으로 앞으로 걸어갈 거라고.
어린 나는 모험을 원했고 그 모험 끝에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다시 떠난다. 내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마 내가 죽는 그 날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나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알지 못한다. 그저 다시 또 앞으로 걸어갈뿐이다.
'삶을 활용하는 길은 행위를 통해 있지 않으며 존재를 통해 모든 것을 행하는데 있다.'
- 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