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증과 함께 살기

슬기로운 병실 생활 6

by 홍재희 Hong Jaehee




연말부터 삼 주간 병치레를 했다. 근 몇 년간 연말은 항상 파티와 또 파티 아니면 한파를 피해 남쪽으로 훌쩍 배낭여행을 갔었다. 시끄럽고 흥분되고 정신없었던 연말. 올 겨울은 다르다. 아프니까 사람이 조용해지고 조심스러워진다. 작은 일에도 쉬이 피로해지고 짜증이 나서 실수할까 봐 부담될까 봐 사람 만나는 것도 저어해진다.


미루어 두었던 건강검진을 받았다. 역류성 식도염과 만성 위염이란다. 게다가 십수 년 전 수술한 말기 치주염. 강력한 주의를 요하니 대학병원에 가란다. 동네 치과에서는 치료 따위가 아예 불가능한 병이라 익히 알고 있는 대사.


것도 모자라 20일 새벽 극심한 어지럼증에 세상이 뒤집히는 아침을 맞다. 이러다 죽지 싶어 기어기어 병원에 갔다. 이석증이 의심된단다. 결국 뇌파 청력 근전도 검사 등등 정밀진단을 받았다. 진단이 나왔다. 병명 양성 돌발성 체위성 현훈증. 의심스러운 이석증 확증.


그러나 결론은 병으로 판명할 만큼 위험하지 않다고. 다만 뇌와 평형기관 사이 통합 시스템이 제기능을 못하는 것으로 추정됨. 그러니까 뉴런과 시냅스와 전정기관 사이에 오작동 뭐 그런 거라는 말. 이유는 모른단다. 원, 인, 불, 명. 삼십 여 만원을 퍼붓어 검사한 결과가 원인불명. 그냥 잘 먹고 잘 자고 푹 쉬고 무리하지 말라는 원론적인 답변만을 들었다. 극심한 장경련이라는 고통에 내시경을 받았으나 장에 아무 이상 없다고 판명했을 때와 똑같다. 뭐 그런 것이다.


'양성'이라는 말은 절대 죽지 않는다, 위급하지 않다는 의미다. 결국 암 같은 병으로 전이되기 전까지 이런 잡병 -고질병은 중병으로 간주되지도 않는다.


한의원을 두드렸다. 증상을 보더니 이런! 글쎄 '풍' 이란다. 머리에 풍이 든 거라고. 몸에 피가 잘 안 돌 때 쌓인 어혈- '담'이 몸 여기저기를 돌다가 머리로 가서 찬바람 맞으면 '풍'. 다행히도 이름대로 바람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며 위로하는 한의사. 무리하면 또 바람이 불고 잘 다스리면 바람처럼 사라지고.


고질병 목록에 새로 어지럼증이 하나 더 추가되시겠다. 위통 복통 치통 편두통 요통 근육통. 지금까지 달고 산 통증의 목록들. 이쯤이면 온갖 고통에는 나도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삶은 예상을 항상 빗나가는 신통한 재주가 있다. 이럭저럭 도합 약 값으로만 팔십 여만 원이 깨졌다. 이 돈으로 파티는 물론이고 비행기 타고 멀리 여행도 갔으련만. 아아. 어리석게도 사람은 한 치 제 앞 길조차 모르는 법이다.


어지럼증이라니까 다들 에이 빈혈 아니 냔다. 한의학적으로는 '풍'이라고 강조하니까 다들 웃는다. 나이가 몇인데 벌써부터....... 쯧쯧. 네가 어렸을 적부터 막살아서 그런다. 약을 먹는 터라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약기운에 밤에 잠을 곤히 자니 몸무게도 늘고 혈색만 좋아진다. 되려 정말 아픈 거 맞냐는 의심의 눈초리. 웃자고 일부러 걸린 꾀병 같다. 내 입으로 이야기하자니 뭘 해도 코미디가 된다. 허허실실 웃는다.


아침 식사 전 역류성 식도염 약 한 알을 먹는다. 그리고 또 아침용 만성위염 약을 먹는다. 다음으로 식후에 아침용 어지럼증 약을 먹고 저녁 식사 전에 위염약을 그 후에는 어지럼증 약을 먹는다. 모처럼 균형 잡힌 식단에 규칙적인 식사를 하고 있다.






2023년 8월 찌는 듯한 한여름에 이석증이 재발하여 또 병원 신세를 졌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두 해 건너 한 번은 입원을 하는 것 같다.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사이좋게 번갈아 가며.


처음 발병했을 때는 충격과 공포가 엄습했는데 이석증도 여러 번 겪다 보니 점점 익숙해진다. 마냥 두렵기보다는 적당히 친근하다. 가깝지는 않지만 아는 체를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사이. 살갑게 굴다가 이내 데면데면한 그렇고 그런 사이. 촉각을 다툴 만큼 생명이 위급하거나 방치한다고 목숨을 잃는 죽을병이 아니기 때문에 그나마 마음을 추스르고 입원을 스스로 준비할 여력이 생겼다. 운이 좋았다. 천만다행한 일 감사한 병이다.


돌아보니 2022년 오늘 1월 4일에 나는 병원 침상에 누워 글을 썼다. 2021년 10월부터 촬영 강행군이라 하루도 쉬지를 못했다. 12월 30일에도 어지럼증을 참으며 간신히 촬영을 마치고 제야의 종이 울리는 한 해의 마지막날 31일 결국 입원을 결정했더랬다.





'양성 돌발성 체위성 현훈.' 이게 뭔 해괴한 병명인가 싶겠지만 흔히 말하는 이석증이다. 이석증이 재발해서 다시 입원했다. 작년에 재발 그리고 1년 6개월 만에 또 재발이다. 재발 주기가 빨라지고 있다. 불청객 이석증이 또다시 찾아왔다니! 역마살이 낀 듯 10월부터 전국 팔도를 정신없이 돌고 또 돌고 특히 12월은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더니만 올 것이 온 듯 싶었다.


그런데 재발이라 그런지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보다는 이번엔 두려움이 덜했다. 공포감의 강도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어지럼증이 오는 그 순간만큼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침에 오줌이 마려워 잠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눈앞이 팽글팽글 돌았다.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의식은 살아있는데 세상만 팽이처럼 광속으로 돌아간다. 지축이 미친 듯이 360도로 뱅뱅 돌고 땅 속으로 끝없이 꺼지는 느낌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 어지럼증에 구토까지 사정없이 올라왔다. 무서워서 덜덜 떨었다. 눈을 질끈 감고 방바닥에 나자빠진 개구리처럼 찰싹 붙어있었지만 땅바닥이 마구 솟구친다. 지축이 흔들리고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눈을 감아도 머릿속이 뱅뱅 돈다. 구역질이 사정없이 목구몽을 타고 올라온다. 죽지 못해 살아있는 느낌. 차라리 의식을 잃고 기절하면 좋겠다. 살려주세요. 아니 죽여주세요. 아니 살려주세요. 죽는 게 낫겠다는 찰나 머리를 고정한 순간 어지럼증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 증세가 정말 웃기는 것은 고개를 똑바로 하고 서 있으면 거짓말처럼 몇 초 후 멀쩡해진다는 것이다. 누워있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거나 머리를 좌우로 돌리거나 뒤로 젖히거나 아래로 숙이지만 않으면 전혀 어지럽지 않다.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이 떠오른다. 끝도 없이 나선형 계단을 빙글빙글 도는 장면을 보면서 토가 쏠렸는데 영화를 안 보고도 코 잡고 제자리 돌기를 하지 않고서도 이렇게 어지러울 수 있다니. 현기증은 실제 겪어본 사람은 그 무서움과 고통을 잘 안다.



지금까지 경험한 사고, 수술 후 통증과 어지럼증 중에 어떤 것이 더 무섭냐고 내게 묻는다면 단연코 어지럼증이다. 수술 후 통증은 진통제를 먹으면 경감되기라도 하지 어지럼증은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찾아와 뇌리를 강타하고는 사지 육신을 볏단처럼 픽 쓰러지게 한다. 예측불가능성과 제어불능성이 가장 무섭다. 때때로 나는 이런 근거 없는 상념에 빠진다. 불안정한 삶에 누구보다 적응력이 뛰어난 데다 불안이라는 두 글자에 코웃음 치는 내게 생 앞에 더욱더 겸손하라고 세상의 모든 발작과 공황과 불안 증세의 두려움을 느껴보라고 이석증의 공포가 찾아온 것은 아닐까.



이석증이란 몸속 평형 기관의 하나인 전정기관 내 이석이 이탈하여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질환이다. 이석은 전정기관에 붙어있는 극미세 한 칼륨 가루다. 그 이석이 제자리에서 떨어져 나가 회전 기능을 담당하는 세반고리관으로 들어가 신경을 과도하게 자극해 생긴다. 이석이 왜 떨어지는지 이석증의 발병 원인은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다. 다만 대략적으로 사고나 두부 충격 같은 외상과 수술, 혈액순환 장애, 바이러스 감염, 오래 누워 있는 경우, 노화 또는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 그리고 유전적 요인으로 유발된다고만 알려져 있다.


이석증으로 죽는 사람은 없다. '양성'이란 말대로 절대 안 죽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석증은 수술로 완치되는 병도 아니다. 죽을병도 아니고 일상을 아주 귀찮고 번거롭게 하는 병, 삶의 질을 서서히 떨어뜨리는 증상일 뿐이다. 병 자체의 경중보다 갑작스러운 어지럼증에 쓰러져 낙상이나 외상을 입는, 즉 2차 사고가 더 위험하기 때문에 의사들은 증세가 나아질 때까지 입원을 권유한다.


그래서 결국 입원을 했다.



입원해서도 하루 종일 이런저런 장치를 달고 지리멸렬한 각종 검사를 받고 MRI까지 찍었다. 혹시나 뇌신경에 문제가 있나 싶어서다. 하지만 결과는 놀랍게도 뇌는 아주 깨끗, 좌우 뇌 모두 상태 양호, 지극히 정상, 뇌 세포 혈관도 아주 아주 건강합니다. 젠장! 결국 돈만 쳐 날렸지 모야! 전정기관 이상에 쓰는 약을 처방받았는데 부작용으로 극심한 졸음. 사흘을 내리 밥만 먹고 잠만 잤다. 몽롱하고 멍한 기분이 마치 항우울제를 먹을 때 무기력에 빠져 멍한 상태로 조는 것과 비슷했다. 똬리 틀고 동면에 들어간 뱀 다람쥐 반달가슴곰이 된 기분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뭐 그동안 모자란 잠을 모두 보충한 셈 치는 거로. 어쩌면 내게 입원은 체력이 바닥났는데도 깡으로 버티다 과로할 때마다 몸이 알아서 강제로 off 스위치를 내리는 건지도. 일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무조건 쉬라는 몸의 명령인지도. 그저 세끼 먹고 약 먹고 자고.... 호캉스가 따로 없다.



이석증은 처음 이비인후과로 진찰을 받지만 재발하면 신경과행이다. 신경과 입원실에는 나 같은 이석증, 메니에르병, 전정신경염, 파킨슨병, 우울증과 같은 심인성 어지럼증 등 병적 증상이 어지럼증에 해당하는 환자들이 죄 모여있다. 그중엔 수년 동안 수 차례 병원을 들락날락하며 온갖 검사를 하고도 원인불명인 만성 어지럼증 환자도 있다. 어지럼증 환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꾀병환자라 자조적으로 표현한다. 곁으로 보기에도 사지 육신이 멀쩡하고 증세가 극심한 급성 환자를 제외하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하루 이틀 지나면 제 발로 걸어 다니기 때문이다. 신경과에 이석증으로 입원한 환자들은 남녀노소 할 거 없이 대체적으로 말랐거나 몸집이 왜소하다. 마르고 나이 먹을수록 여성이 더 잘 걸리는 경향이 있다.


저더러 말라서 날씬해서 좋겠다는 분들, 건강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랍니까?


어지럼증은 차차 가라앉았지만 편두통은 여전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십 수년 째 날 괴롭혀온 고질이다. 한쪽 머리를 돌로 짓누르는 듯한 기분 나쁜 이 통증. 편두통은 개별 인간이 증세를 겪지만 실은 어떤 한 사람에게 오는 병증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만이 겪는 병이 아닐까. 이상한 말일 테지만 편두통은 마치 콜 니드라이, 희생양처럼 누군가가 감각하고 그로 인한 파장이 서로에게 전달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편두통만큼은 오직 인간의 병, 인류의 병이라는.



편두통의 원인은 여전히 의사도 모른다. 원인불명이다. 의사는 재차 MRI 나 CT를 찍어보자고 하겠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머리가 아프거나 먹먹할 땐 커피를 들이붓거나 술을 마셨던 거 같다. (한 때는 타이레놀 중독이었다.) 그러면 멍한 머릿속이 카페인으로 각성되거나 알코올로 통증이 마비되었다. 그런데 의사에게 알코올과 카페인은 이석증에 악영향을 미치니 둘 다 모조리 끊거나 최대한 자제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가장 아쉬운 건 이젠 롤러코스터와 헤드뱅잉 같은 회전놀이와 안녕해야 한다는 사실. 슬프다. 하아, 살려니 이제는 정리해야 할 인연들인가. 떠나보내야 할 것들이 점점 늘어간다.



고즈넉한 병실 복도를 지나 승강기에 올랐다. 한적한 병원이 낯설다. 영상의학과 MRI 촬영실을 둘러본다. 2021년 12월 31일 입원, 2022년 1월 1일 첫날을 병원에서 보내는구나.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병실에서 맞이하다. 이 날을 기념할 거리가 생겼다. MRI 촬영기사님 훈훈한 비주얼.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뒤태의 황금비율. 바라만 봐도 절로 미소가. 묵은해를 보내고 새 임인년 새해 선물. 덩달아 기분 좋아졌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