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병실 생활 4
1.
입원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 비가 두 어 차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더니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바람에 우수수 우수수
한 주 사이에
병동 밖 노란 은행나무가 앙상해졌다
병실에 누워 있다 보면
시간이 그대로 멈춰 선 듯도 하고
자고 일어나면 밥
주사 맞고 약 먹고 나면 밥
멍 때리다 보면 또 밥
밥때만 꼬박꼬박 돌아온다
시간이 사정없이 흐른다
문득 땅바닥에 뒹구는 낙엽이 내 신세
들어올 땐 가을이더니 나갈 때는 겨울이겠구나
계절을 도둑맞은 기분
계절이 뒤통수를 치고 도망간 기분
속절없이 늙어버린 이 기분.
2.
말일까지 마감칠 일이 한 더미. 전부 내가 없이는 굴러가지도 쫑이 나지도 않는 일. 프리랜서가 병이나 눕게 되면 일을 대신 맡아서 해 줄 대체자가 없다. 글이든 편집이든 영화든 뭐든 시작한 사람이 끝을 내야 한다. 사 년 전 한 달 동안 입원했을 때는 보험 없는 백수라 병원비 걱정 외엔 차라리 맘이 편했다. 어차피 나가 봤자 책임질 일이 없었으므로. 반대로 이번엔 돈 대신 퇴원 후 마감까지 쳐내야 할 일 걱정에 병상에 누워있어도 편치 않다. 마음이 무겁다.
3.
의사가 예상보다 부기가 빠지는 속도가 늦다고 걱정한다. 그래서 퇴원하더라도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푹 쉬어야 한다고 신신당부. 충분히 쉬어 깨끗하게 완치시키지 않으면 언제고 또 같은 곳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오랫동안 괴롭히는 고질이 될 수 있다고 주의를 준다. 면역력이 극도로 약해진 데다 초기에 감염을 막지 못해서 예후가 나쁜 터일 것이다.
나이 먹으니 사소한 염증도 어렸을 적처럼 약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난들 쉽게 낫질 않는다. 다쳐도 크게 다치고 상처도 깊고 후유증도 길게 남는다. 염증으로 곪은 발목은 하필 십자인대 파열로 수술한 다리다. 다친 다리는 일주일 사이에 근육이 쑤욱 빠져버렸다. 수술한 다리 쪽이 또 사달이 나고 보니 불현듯 울적해진다. 항생제에 푹 절여진 몸뚱이. 앞으로 더 크게 아프면 약도 잘 안 들을까 걱정이다. 염증에 최악이라는 알코올. 이참에 술도 끊어야 할까..... 이래저래 술 없이 보내는 우울한 연말이 될 것 같다.
-가뜩이나 싫어하는 계절성 우울이 발병하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4.
야심한 밤, 참 괜찮은 놀이터- 병원. 이곳에 모여든 각양각색 인간군상. 복도를 오고 갈 때마다 병실 앞 이름표를 보고 또 본다. 어제도 그제도 본 이름이 있고 오늘 새로 바뀐 이름도 있다. 십 대에서 환갑을 넘긴 사람까지. 다들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 누워 있게 되었을까. 지난번 마주친 환자는 어느 병실 누구일까나. 그 사람은 왜 한밤에 복도를 서성였을까. 휠체어에 앉은 다른 그는 굳게 잠긴 병원 현관에 기대어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중이었을까. 오다가다 다른 환자들을 볼 때마다 병문안 온 사람들을 훔쳐보면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는다.
병실 복도만큼 재미있고 솔깃한 공간도 드물다. 갖가지 상상을 자극한다. 모두가 잠든 밤. 옆 침상 환자가 새근새근 코 고는 소리를 신호 삼아 휠체어를 밀고 복도를 스케이트 타듯 앗싸, 미끄러진다. 빈 승강기로 층마다 혼자 오르락내리락하면 무언가 남몰래 은밀한 작업을 수행하는 착각마저. 게다가 코에 바람이라도 쐬러 밖에 나갈 채비를 하면 마치 학창 시절 몰래 야자 보충 수업 땡땡이치는 기분에 야, 신난다!
-그새 정들었나 보다. 혼자 가을비처럼 쓸쓸하고도 봄비 같은 촉촉한 감상에 젖는다. 조만간 퇴원하기 전 나 홀로 병원 밤놀이를, 혼자만의 의식처럼, 이별식이라도, 이 공간 이 장소를 잊지 않도록 눈에 꼭 넣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