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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길섭 Oct 10. 2024

페인트칠

근래에 내 심중에는 시계추가 오가듯 불안과 죄책감이 갈마들었다. 문학도로서 발전이 더디다고 느꼈던 탓이다. 나는 문창과를 나온 사람이 아니기에 관련된 일을 할 수 없다. 결국 전혀 무관한 일을 하면서 주경야독하는 게 내 공부의 전부인데, 현생에 치이다 보니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하루가 증발한 날도 많았다.

'이거 이래서야 되겠나' 싶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오히려 더 큰 태만으로 불안을 덮어버렸다. 그러나 이내 불안은 그걸 찢고 나와 죄책감으로 일변해버렸다. 계속 반복이었다. 요즘 내 머릿속엔 항상 한 가지 가정법이 자연 뒤따랐다.

'딱 일 년만 돈 걱정 안 하고 공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글쓰기에는 소위 삼다(三多)라는 것이 있다. 잘 쓰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다독), 많이 쓰고(다작), 많이 생각해야 하는 것(다상량)이다. 그리고 현재 나에게 가장 부족한 점은 단연코 다독이다. 짧든 길든, 희문이든 진지한 글이든 블로그에 천 편이 넘는 글을 썼고,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의하면 생각도 많은 편이다. 하지만 책은 그 유명한 <어린 왕자>조차 읽어보지 않았다.

올해 6월 13일, 문단에 발을 들이기로 결심한 이래로 고작 한 달에 두 권꼴로 독서해 왔다. 계산을 해보자. 예컨대 <레 미제라블>은 다섯 권, <신곡>은 세 권으로 분권되어 출간되는 게 보통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속도로 문학만, 그것도 이런 장편 두 개 읽는 데에만 최소 네다섯 달은 걸린다는 값이 나온다. 모든 사람이 필독해야 하는 책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최소'라는 기준이 있고, 그것이 바로 고전이다. 처음에는 한 이삼 년 지나면 책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요즘은 그게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고 느다.

음악을 하는 친구에게 최근에 이런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그녀가 마음에 와닿는 말을 해주었다.

"그렇지만 너가 진짜 이렇게 진심이고 열정이 있으면 얼마가 걸리든 언젠가 너만의 멋진 글을 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친구의 위로를 들으니 문득 얼마 전에 품삯을 받고 페인트칠을 했던 게 생각났다. 처음 해보는 거라 나는 페인트를 붓에 듬뿍 묻힌 뒤 힘을 주어 쉼 없이 연달아 칠하면 될 줄 알았다. 허나 아니었다. 아무리 여러 번을 덧칠해도 빈 곳이 좀처럼 채색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아저씨가 요령을 알려주셨다. 페인트를 최소만 머금은 채 스치듯이 칠하고, 어느 정도 굳기까지 여유를 갖고 '기다리라고'. 덧칠은 그런 뒤에 해야 오히려 더 잘된다고. 그 말대로 해보니 훨씬 깔끔하게 채색됐다.

나는 내가 걷는 길 또한 페인트칠과도 같다고 믿고 싶다. 내가 나아가는 속도가 더디므로 오히려 내가 더욱 농익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도 때로는 생각을 적기 위해 잠시 덮어야 더 좋듯, 문학도로서 나의 발전도 그런 거라고 믿어본다. 물론 지금까지의 나는 한 가지에 빠지면 다른 것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거기에만 내 모든 것을 갈아넣은 광적인 사람이었기에 이런 방식이 나에게 맞을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나에겐 주어진 현실이 그러하니 그거에 맞춰서 생각해보련다. 그렇게 마음먹고 오늘도 책을 펼쳐본다. 한두 줄이라도 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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