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년에는 휴가를 왕창 몰아 런던과 파리에서 2주 살기를 야심 차게 계획했다. 유창하게 식당에서 주문이라도 한번 해보고 싶어 여행 영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내년이 뭐람. 당장 지금이 힘들다. 뭔가 단타 교육이라도 들어야 했다. 퇴근 후, 주말에는 힘들다. 주중에 받을 수 있는 상담 관련 교육을 찾다 찾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이 시간에 영어 공부를 하는 게 나을까 싶었다.
* 이런저런 자투리 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범죄와 심리에 대한 키워드를 몇 년째 넣었다 빼는 나를 보며 언젠가는 해보고 싶은 공부, 지금 시작해볼까 싶었다. 졸업해야 하고, 수업을 들으려면 최소한의 영어 공부가 필요했다. 최소한이 안되면 시작할 수 없는 제한이다.
* 옆에 앉은 동료가 해외로 출장을 갈 일이 생겼다. 딱 봐도 영어가 능통할 것 같은 스펙을 가진 동료를 보며 부러움과 존경심이 든다. 화장실에 앉아 깔아놓은 영어 앱을 보며 나랑 안성맞춤이 없다며 문을 내린다.
집중하지 못하고 중간중간 검색대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순간 런던, 순간 학교, 순간 범죄심리, 순간 영어공부 그 검색의 늪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본다. 나는 예전에도 일이 너무 바쁘고 힘들어 뻗을 것 같은 날, 아린 눈을 비비며 새벽까지 책상에 앉아 지금과 같이 ‘학교’와 ‘영어 공부 방법’을 검색했다. 공부를 시작해 볼까? 그래 해보자! 하다 눈꺼풀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그래 그러려면 영어를 우선 공부하자’하고 정리한 후 잠이 들었다.
일전에 수용과 전념치료(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 ‘자기 분석’을 일 년 반 정도 받은 경험이 있다. (상담을 하는 사람인) 나를 덜 괴롭히고, 사랑하며 살기 위해 훌륭한 상담자에게 상담받는 과정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덕분에 나는 내가 경험해야 할 감정을 경험하고 싶지 않을 때 ‘진학 학교+영어 공부 방법을 검색하는 것’으로 도망친다는 것을 알았다. 액트에서는 이를 ‘경험회피(※ 액트에서 고통의 원인. 삶의 궤도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기능을 하는 모든 행동)’라고 한다. 개개인이 경험하기 힘든 감정을 피하고 싶을 때 술을 마시거나, 전화를 하거나 하는 등 본인만의 즐겨찾기 경험회피 행동이 있다.
* 당장 써야 하는 보고서가 써지지 않아 마음이 불안할 때,
그래도 한 자 쓰기보다 손끝으로 학교를 검색하고
* 계획한 영어 공부를 미루는 나에 대해 실망하며,
한마디라도 연습하기보다 손끝으로 영어 공부 방법을 검색하고
* 이 직장에서 더 일할 수 있을까 무력감이 들 때,
쉬어가기보다는 손끝으로 학교를 검색하며 나를 괴롭힌다.
오늘은 검색을 멈춘다. 특별히 다른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검색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손가락을 쉬게 한다. 손가락아 쉬어보자, 쉬자!
* 사진 작품 : 스칼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