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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ngtake Mar 31. 2023

우리 집 보안관

나는 평일에 올해 73세인 모와 같이 살고 주말에는 아이들과 같이 산다. 평일에 모와 같이 살지만, 퇴근 후 몇 시간, 야근이다 뭐다 하는 날을 빼면 실제 같이 보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테다.      


20대 중반부터 떨어져 살다가 40대 중반이 되어 같이 살게 된 모의 깨알 같은 새로운 모습에 놀라는 일이 많다. 태어나서 20대 중반까지 꽤 오랜 시간 모와 함께 살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나는 모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내가 아는 모는 시부모, 남편, 다섯 자식, 남편의 동생까지 총 9명의 세끼를 매일 해먹이며 살았고 생케일주스도 갈아먹였다.      


그러면서도 모는 책을 좋아했다. 책을 읽는 모습은 기억나지 않지만, 집에 책이 많이 있었고, 그 책의 주인이 모라는 것은 기억한다. 이제 와 생각하니 모는 그 책들을 언제 읽었을까?     


그리고 모는 음악을 좋아했다. 아침에 잠에서 깨기 전 LP판으로 김현식의 음악을 틀어주었고, 초등학교 저학년임에도 가수 박정훈의 콘서트에 우리를 줄줄이 데려갔던 기억이 있다. 모는 밥을 차리느라, 도시락을 싸느라, 시부모와 남편의 시중을 드느라 늘 겨를이 없던 사람인데 우린 어떻게 콘서트에 갔을까 싶다. 그래서일까 모는 객관적으로는 힘들고 불쌍한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보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모는 3대 독자 가부장에 시부모를 봉양하며 철저하게 충실한 가정주부로 살았지만 담배 피우는 딸을 위해 몸소 담배를 사다 주었고, 내가 동거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모의 반전 매력을 요즘 매일 목격하고 있다.     

 

“(과체중인 여성을 보며)

   저래서 남자가 좋아하겠나...”

“(탑을 입고 온 동생 애인을 보고)

   아무리 그래도 저런 걸 입고 인사를 오고...”

“(술에 취해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에게)

    저래 밤에 술을 마시고 취해가지고...”     


여성에 대한 코멘트가 많은데 안타까움을 담아 말하지만 결국은 비난이고, 탓하는 내용이다.


나는 이런 모의 이야기를 통해 회사 동료, 상사, 주변인을 이해하고 덜 화내게 되었다. 약자와 정의의 편에 서는 모가,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후원하는 모가, 이런 말을 할 수도 있구나 싶다. 정확히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내 옆에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다만 휘슬을 불어야 한다. 그냥 넘어갈 순 없지 않은가. 내가 집을 비운 주말이면 언니들의 전화가 온다. “보안관! 모가 또 여혐 발언했어!”     


모가 잦은 휘슬에 지치지 않기를 바라며, 같이 새롭게 배워가면 좋겠다.

모가 경험한 세상은 여자, 남자 모두에게 정해진 박스 속에 살라고 가두었으니 답답하고 힘들었지.

이제 그 박스를 조금씩 찢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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