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7년 결혼했고, 2021년 별거를 시작했다. 남편은 결혼할 때부터 자연과 가까이 살고 싶어 했고, 깨복과 만복이 태어나면서 그런 생각들은 더 깊어졌다. 다만 나는 늘 I love Seoul이었다. 시골을 동경하거나 호감이 있지 않았다. 특별히 서울이라는 지역이 좋았다기보다는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러웠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어린이집과 이웃이 있는 이 마을에서 사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다 코로나라는 상황이 왔다. 나는 일주일에 몇 번 재택근무를 시작했고, 학교를 가지 못하는 초등학생 깨복과 어린이집원생 만복이 한 집에 갇히게 되었다. 쨍한 빛이 들지 않는 20평쯤 되는 빌라에서 우린 하루 종일을 보냈다. 집 근처 운동장도, 공원도 출입금지 라인이 쳐지면서 마땅히 축구 한번 할 공간을 찾을 수도 없었다. 코로나 상황이라 주변의 이웃들도 만날 수 없었고, 마실도 할 수 없었다. 기약이 없다는 이 상황이 막막하다 느껴질 즘 만복의 입학이 다가왔다. 시골, 작은 학교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는 몇 주도 더 살기 어렵겠다는 마음이 들 때였다.
그동안 눈여겨보며 가끔 여행을 가곤 했던 지역을 골랐다. 생활비를 벌어 살아야 하니 나와 남편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하고, 나는 당장 회사 일을 정리할 수 없어 남편 혼자 깨복과 만복을 돌보며 지내야 하는 만큼 학교와 가까운 곳에 지낼 집이 있어야 하고, 우리는 차가 없기에 아이들이 아플 때 갈 병원이 집 근처에 있는 곳이어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시골 작은 학교, 학교 옆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 그 옆에 훌륭한 자연이 품어있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금요일 퇴근하고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퇴근해 집으로 간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첫차를 타고 출근을 한다. 기차 타는 시간을 버리는 시간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일념이 있었으나 곧 쏟아지는 잠에 뭔가를 하는 것은 없어진 지 오래다. 자다 졸다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출근해 책상에 앉아있다. 보통 깨는 시간에 깨서 기차를 타고 출근한 것뿐인데 왜 유난스레 피곤하지 모르겠다.
깨복과 만복에게 평일에 엄마가 보고 싶지 않느냐고 물으니, “솔직히 말하면 생각이 하나도 안 나다가 목요일 저녁이면 내일 엄마가 오는구나 하고 생각이 나.” 하고 대답한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하고 눈물 한 방울 흘려주길 기대했던 내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인데, 그러지 않을 아이들이라는 것도 내심 짐작했던 바다. 그래, 각자 너무 잘 지내고 있구나. 다행이다 싶은 생각과 마음으로 바꿔먹는다.
‘듀얼라이프’로 살아온 지 2년이 다 되어간다. 오순도순 사는 깨복, 만복, 남편 또한 매우 좋아 보인다. 5일간의 프리데이가 보장된 나 또한 좋지 않을 수가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다고만 말하긴 어렵다. 잠들 때 아이들의 살결과 숨결이 너무 그리울 때가 있고, 내가 달려가서 해치우고 싶은 일들도 종종 있다. 다만, 지금은 각자 만족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올해를 넘기고, 한해만 더 별거를 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