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누군가와 산다는 것
김현아 작가 :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김현아 작가의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는 책을 보고 한동안 책을 쓰다듬었다. 이 책이 과연 나올 수 있었던 책인가를 생각하며 책을 뒤적인다. 언젠가 이런 말을 무심결에 했었다. “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정말 마음이 무거울 것 같아. 여행도 마음대로 못 가고...”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하지 않아야 하는 말이 맞다. 만약 내 옆에, 그 일을 겪고 있는 사람이, 그 말을 들었다면 마음이 찢어지는 말일 테다. 누군가의 일상이 없어지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작가와 작가의 배우자는 둘 다 의대 교수다. 딸이 양극성 장애를 진단받으며 그 이후를 살아가는 과정에 대한 글을 썼다. 작가는 자신이 다른 양극성 장애를 가진 자녀를 둔 부모보다 인적, 물적 자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음을 고백한다.
그럴 테다. 보통 양극성 장애와 같은 뇌 질환은 질환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쉽게 부모 기질의 문제, 양육자 태도의 문제로 생각한다. “부모가 저렇게 멀쩡한데 왜?”, “부모가 저렇게 애를 키우니까 그런 거지...”, “엄마가 바빠 애한테 제대로 사랑을 못 줬겠지...”. 쉽게 부모의 결점을 찾고, 보태어 더욱 가혹하게 모에게 책임을 묻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작가는 다른 결의 비난을 감수했을 것이라 나는 추측한다.
나는 아이의 자해 상처를 목격하고, 자살하고 싶다는 아이의 슬픈 울음을 들었던 작가의 하루를 그려보았다. 작가는 이 울음을 듣고 양극성 장애를 공부하고, 아이에게 맞는 약을 찾고, 자신의 환자를 보며 진료했고, 가끔은 저 먼 나라의 학회도 갔다. 아이의 곁에 있으면서도 떨어져야 할 때는 떨어졌고, 생활비 등 아이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몫은 그 몫대로 남겨주기 위해 현실적으로 노력했다.
지금은 좀 덜하지만 깨복과 만복이 어렸을 때 나는 순간순간 올라오는 불안이 컸다. 특히 나는 모르는 사람이 아이들을 공격하는 상상을 자주 했었다. 어린 만복을 안고, 그보다 두 살 많은 깨복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나에게서 누군가 깨복을 빼앗아 가는 상황, 혹은 지하철 플랫폼에 서 있는 우리 모자를 누군가 뒤에서 밀어버리는 구체적인 상상이었다. 빌딩 안에서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불이 나면 만복은 안고, 깨복은 업어야 할지 아니면 건장한 누군가에게 깨복을 부탁해야 할까, 진지하게 생각했다.
깨복과 만복에게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것을 불안해했다. 적당히 슬프고 힘든 일은 괜찮지만 내가 감당하기 힘들어 아이를 미워할 것 같은 사건 사고 혹은 중독이 온다면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아이는 내가 아님을 알면서도 아는 대로 행동하기가 어렵다.
이 글을 보면서 깨복과 만복이 어떤 일을 겪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일에 대해 제대로 알고, 현실적인 도움의 한계선을 정하는 수밖에 없겠다는 희망 어린 체념, 또 그러는 중에 따뜻한 하루가 가끔은 오겠지 하는 기대를 본다. 작가는 딸의 의사로부터 딸이 자살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들었던 날을 말한다. 이후로도 작가는 어쩔 수 없는 현실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았다. 수천 갈래 눈물과 멍한 밤들이 오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생각한다. 세상의 슬픔과 고통이 내 아이만은 비켜가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찾아오는 슬픔과 고통이 있다면 잘 겪어낼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저도요. 하고 간절하게 바란다.
이러한 책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