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199305

4월 공통주제 <봄> ㅣ 임나무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1-22 오후 1.57.50.png 책 먹는 여자
매일 500 페이지를 읽습니다. 제가 글을 쓴다면 '카프카'처럼 쓰고 싶어요. 카프카를 읽으면 약간 푸르스름한 흑백영화를 보는 기분이 듭니다.


작가 프로필 ㅣ 임나무

취미가 독서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엄청난 독서광.

자신이 읽은 책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안녀엉! 뭐야, 오늘 이게 다야? 시작해야 하는데.”

가톨릭 회관의 작은 모임방에 헐레벌떡 들어온 정수는 모인 인원을 둘러보더니 회장 자리로 가서 앉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레귤러 미팅이 시작하는 오후 다섯 시를 십 분 남짓 지났는데 모인 인원은 겨우 여섯 명뿐이었다. 이래서는 디스커션을 두 개 조로 나누기도 어중간하다.

“봄이잖아요, 형.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누가 이 칙칙한 데에 와서 영어 씨부리고 싶겠어요?”

성균이 말했다. 2학년인 성균은 위클리 저널을 만들고 배포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으니 빠지고 싶어도 빠질 수가 없었다. 1학년 내내 뺀질대다가 뭔가 책임을 지고 매주 제 시간에 나와야 하는 일을 맡아놓았으니 영 적응이 안 되었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스텝들은 와야 할 거 아니야! 이 봄에 제일 바쁘신 새내기들도 두 명이나 왔는데 스텝들이 세 명밖에 안 나오는 게 말이 되냐고. 안 그러냐, 완주야?”

정수는 문 곁에 앉은 완주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완주를 보는 정수의 표정이 급 장난스러워졌다.

“에? 하아… 또… 그렇죠. 뭐.”

딴생각에 빠져있던 완주는 정수의 갑작스런 물음에 놀라 대충 얼버무렸다. 총무 일을 하고 있는지라 적은 인원이 뒷풀이 비용을 얼마씩 걷어야 할지 계산 중이었다. 오늘 온 새내기들은 두 번째 참석인 이번까지는 갹출에서 제외된다. 뒷풀이 때 선배들이 오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네 명이서 여섯 명 식사와 술값을 지불해야 한다. 적립된 회비가 거의 바닥인 상태로 총무 일을 넘겨받은 완주는 모임 때마다 돈 계산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저만치에 혼자 벨이 꼬인 것처럼 앉아있는 근호는 걸핏하면 돈이 없다며 천 원, 이천 원만 달랑 내고 나가버린다. 동기가 아니라 웬수다.


“완주, 혜영이랑 지혜는 왜 안 왔어?”

그새 자리에 가 앉은 정수가 물었다.

“전 모르죠, 오빠…”

“웃기시네. 모르긴 뭘 모르냐? 걔네 소개팅하러 갔지? 형, 아마 지금쯤 꽃단장하고 ‘5번가’에 있을 걸요.”

완주는 어이가 없었다. 성균이 저 시키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이 년들이 나한테는 비밀로 해달라고 해놓고 얘한테는 다 말한 건가?

“뭐야, 그럼? 우리 완주만 빼고 지들끼리 소개팅하러 갔어? 여자들끼리만 간 거네. 축제 대비용이야?”

정수가 또 익살맞게 눈을 똥그랗게 뜨며 완주를 걸고넘어졌다. 아마 가까이에 앉았더라면 또 볼을 꼬집었을 것이다. 완주는 늘 통통한 볼 가득 사탕을 물고 있는 듯했다. 정수는 가끔 그런 완주의 볼을 꼬집으며, “야, 사탕 빼! 대학교 2학년이 아직도 베이비로션 냄새가 나면 어떡하냐? 향수 하나 사주랴?” 하고 장난을 쳤다. 그럴 때마다 완주는 짧게 “악!” 하고는 정수가 헝클어뜨린 선머슴 같은 짧은 머리를 툭툭 털며 개구지게 씩 웃었다.


수줍은 듯이 앉아있던 두 새내기 여학생들이 분위기를 알겠다는 듯이 킥킥 웃었다.

“니들 이 언니를 본받아야 돼. 1학년 때부터 동아리랑 결혼하고 정절을 지키는 훌륭한 언니야. 미팅이나 소개팅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근호가 한술 더 뜨자,

“언니인 건 맞아요?”

새내기 중 한 명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오, 이것들 봐라. 적응 빨라, 적응 빨라!”

완주의 남자 동기들은 이런 대담한 1학년들의 멘트가 대단히 흡족한 모양이었다.

“고만! 이제 우리끼리라도 시작해야 해. 저번에도 우리 뒷 팀이 제시간에 끝내달라고 뭐라 하더라. 성균, 저널 돌려!”


레귤러 미팅은 맥없이 진행되었다. 나른한 봄 햇살이 미팅룸에 깊게 들어오자 다들 유체이탈한 표정들이었다. 정수는 문득 지혜가 있었으면 좀 낫지 않았을까 싶어서 괜히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간혹 미팅 때 지혜랑 같은 디스커션 조에 넣어달라고 눈치를 주는 남학생들도 있었고, 뒷풀이 때마다 지혜 옆자리는 은근한 신경전이 오가는 로열석이었다. 동아리에 별로 충실하지 않은 지혜가 부회장이 된 건 아마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 여섯 명이 전부였던지라 디스커션은 두 조로 나누고 각 조에 새내기 한 명씩 끼워 끝냈다.


“뒷풀이 장소는 저번이랑 같습니다. 명보성으로 이동할게요.”

클로징송을 부르기가 무섭게 사파리를 백팩에 구겨 넣고 등에 둘러멘 완주는 성균과 근호에게 새내기 여학생들의 에스코트를 부탁하고 먼저 명보성으로 달려갔다. 카운터에 앉아있던 사장님이 완주를 알아보고 지하로 내려가는 복도 불을 켜주었다. 불이 켜지자 퀴퀴한 냄새가 훅 올라왔다.

“오늘은 몇 명?” 완주를 뒤따라 내려오며 사장님이 물었다.

“작은 데로 할게요. 한 열 명? 열두 명?”

“그려 그럼.”

“예, 웬만하면 다 식사하라고 할게요. 감사합니다.”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듯이 손을 한 번 올려 보이더니 복도 위로 올라갔다. 인사하는 소리가 나며 동아리 사람들이 우당탕 내려왔다. 그런데 다섯 명이 아니라 일곱 명이다. 4학년 동아리 커플 두 명이 함께 들어왔다. 4학년들은 대부분 레귤러 미팅에는 참석하지 않고 뒷풀이 시간에 맞춰 왔다. 일종의 예비역이라고나 할까.


“어, 언제 오셨어요? 저도 방금 왔는데.”

“딱부리 너 임마, 우리 성모상 앞에서 너 보고 불렀는데… 그냥 못 듣고 쌩하니 가던데?”

여자친구의 손을 잡은 채로 완주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남자 선배가 그렇게 인사를 했다.

“딱부리요? 언니 별명이 딱부리예요?”

여자 새내기들이 또 킥킥거렸다.

“응, 머털이라고도 하지.”

완주는 이제 포기했다는 듯이 이실직고했다. 새내기들이 동아리에 적응하려면 뭔가 물고 뜯을 것을 던져줄 필요가 있다. 평소 같으면 분위기 잘 맞춰주는 여자 동기들이 그 역할을 할 것인데, 오늘은 완주뿐이니 어쩔 수 없다.

“꺄아, 언니랑 너무 잘 어울려요.”

새내기들은 깔깔대며 선배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자 새내기들은 늘 뒷풀이의 중심이다. 식사와 술이 나왔다. 이제 2차 장소를 알아보러 다닐 아홉 시까지는 별로 할 일이 없다.


근호는 여전히 벨이 꼬인 것처럼 문가에 앉아서 겉돌고 있었다.

“왜, 오늘도 돈 없냐? 밥 좀 시켜. 맨날 인원수보다 주문이 모자라니까 여기 사장님 보기 민망하단 말이야.”

완주가 곁에 앉으며 투덜거리자, 근호는 말없이 소주잔을 내밀고 술을 부었다.

“뭐 나만 안 시키냐? 마셔라.”

둘은 술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완주는 이를 꽉 깨물었다. 소주는 아무리 마셔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단무지 접시를 하나 비워서 짜장면을 반 나눠 근호에게 내밀며 조용히 물었다.

“왜, 지혜 때문에 그러냐?”

“무슨…”

“아직 너한테 답도 안 줘놓고 오늘 소개팅 가서 삐진 거 아니냐고.”

“… 마셔.”

요즘 들어 부쩍 홀쭉해진 근호의 얼굴은 벌써 벌겋게 달아올랐다. 여드름이 많은 얼굴은 붉다 못해 검게 보이기까지 했다.


“지혜가 혹시 너한테는 아무 말 안 하디?”

짜장면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근호가 조용히 물었다. 안 그래도 완주는 망설이고 있었다. 지혜의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니들끼리 거기서 뭐 하냐? 아무리 축제가 코앞이라지만 근호도 눈이 있다, 완주야!”

장난기 많은 4학년 선배가 또 완주를 놀리고 있었다.

“예, 오빠. 그리고 저도 눈 네 개나 있거든요.”

완주는 선배를 향해 씩 웃고는 근호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너도 소개팅해. 1학년 소개해줄까? 우리 방에 1학년 두 명 들어왔어.”

근호는 술잔을 들다 멈추고 완주를 째려보았다.

“왜, 지혜가 난 안 되겠다디? 아니면 이제 내 하소연 들어주는 거 질렸냐?”

“미친놈… 아가리 닥쳐. 겨우내 니 연애 상담해준 거 돈으로 치면… 됐다, 술이나 처먹어.”


근호는 지난 겨울부터 완주의 기숙사에 하루가 멀다고 전화를 해댔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울리는 전화 때문에 선잠이 깨곤 했던 완주의 룸메이트는 근호를 완주의 남자친구라고 선언했었다. 전화선을 길게 늘여 복도에 앉아서 근호의 넋두리를 듣다 보면 연인과의 장시간 통화를 위해 담요를 둘러쓰고 복도 바닥에 앉아있는 기숙사 여인네들 한두 명과 꼭 눈인사를 하게 되었다. 동병상련이랄 수도 없고… 그 여인네들이 코맹맹이 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해봐, 빨리~’라고 속삭이는 동안 완주는 전화기에 대고 ‘멍청한 새끼, 병신 새끼, 미친 새끼’라고 골백번도 더 뇌까렸을 것이다. 지혜를 짝사랑하면서도 고백하지 못하는 근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사실 그것뿐이었다. 무조건 의대생만 사귄다는 소신을 가진 지혜에게 근호는 그저 동아리 동기일 뿐인데, 완주가 그 말을 해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아니, 처음에 몇 번인가 운을 뗐는데 근호는 ‘너 혹시 나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야?’ 하며 펄쩍펄쩍 뛰었다. 그 후론 그냥 그래그래 하며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지혜는 오늘 근호를 피하려고 일부러 소개팅 계획을 잡은 거였다. 단짝 혜영이와 함께.


그 날의 뒷풀이는 다행히 졸업생 선배가 서너 명 오고, 회장과 스텝들에게 ‘신입생이 적은 건 스텝들이 제대로 동아리를 꾸리지 못하는 거’라고 돌아가며 한마디씩 한 댓가로 이삼 만 원씩 주고 간 덕에 2차까지 펑크나지 않고 끝났다. 정수는 새내기들과 함께 선배들에게 3차에 끌려갔다. 이미 술에 떡이 되었음에도 “다음 주에는 니네 학교 앞에서 해야 하니까 장소 섭외하고 전화하라”는 미션을 잊지 않고 완주에게 하달했다.


“아… 나는 니네 학교 축제 가기 싫은데…”

성균이 투덜거렸다. 완주는 성균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혀를 찼다.

“쯧쯧… 그래, 내가 니 맘 알지. 어디 여대를 남자들이랑 같이 오고 싶겠냐. 왜, 나라도 그날 치마 입고 반겨주랴?”

“야, 장완주! 너 치마 입기만 해봐. 니 다리, 그냥 딱 봐도 제주도 김장 무야. 어딜 치마를 입어. 근데 너 치마가 있긴 있어?”

“없지. 사실 바지도 두 개밖에 없어. 근데 저번에 니가 내 자전거 자빠뜨려서 이 희귀한 바지 빵꾸났쟎아.”

“에이, 괜찮아. 찢어서 입으니까 훨씬 낫잖아. 그 나이가 되도록 자전거를 못 탈 줄 내가 알았냐? 어, 버스 왔다. 나 먼저 간다.”


성균이 탄 버스가 출발했다. 열한 시 반이었다.

근호가 완주를 힐끗 보며 물었다.

“걸을래?”

“지금? 그래 뭐.”


근호는 서울 전체를 모두 걸어서 다닐 수 있는 녀석이었다. 완주가 오늘 기숙사에 미리 외박 신청을 해놓았다는 걸 근호는 알고 있었다. 이런 날이면 완주는 망원동에서 자취하는 선배 언니네에서 자곤 했고, 그때마다 근호는 걸어가자고 떼를 썼다. 그러고는 새벽 한두 시쯤 완주의 선배네 집 앞에 도착하면 근호는 택시를 타고 압구정동 집까지 가는 거였다. 근호는 완주를 좋아했다. 여자로서가 아니라 이야기 상대로서 말이다. 완주와 여자는 잘 매치되지 않았다.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에 두꺼운 안경, 짧은 더벅머리, 찢어진 청바지, 회색 사파리에 백팩, 팔찌 대신 낡은 가죽끈을 손목에 매고 다니는 완주는 여대를 다닌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비주얼이다. 털털하게 하는 짓도 정말 남자 같았다. 뒷풀이 값을 빼먹을 때도 그것이 완주라서 죄책감이 덜했다. 무엇보다도 남자인 근호와 비교해도 걷는 속도가 뒤지지 않았다.


둘은 시청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봄기운이 무르익어 몸이 한결 가볍다. 근호가 여전히 서울 지리에 어두운 완주를 놀리느라 일부러 길을 돌아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같은 자리로 되돌아나오면 완주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근호에게 발길질을 하곤 했다. 1, 2차에 나눠 마신 소주와 맥주는 시간에 대한 압박감을 조금 느슨히 풀어놓았다. 완주와 근호는 별 말도 없이 한참을 걸었다. 충정로를 지나 아현동에 접어들자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어 있었다.

“근데 너 지혜한테 영영 말 안 할 것 같더니만 왜 했어?”

완주가 물었다. 근호의 머릿속이 온통 지혜로 꽉 차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꽃구경 가려고.”

“아이고 어쩌냐, 봄꽃이 다 지도록 답을 못 들어서.”

“그러게. 벚꽃이 져서... 맘 접을 뻔했는데 라일락이 피더라고. 근데 이제 라일락도 지고... 만 스무살 성인이 되는 날도 낼모레. 아무 것도 못하는 건가?”

“뭐? 아이고… 이 변태 같은 놈의 시키.”

겨우내 혼자 끙끙 앓기만 하다가 봄바람이 불어오기 무섭게 서둘러 고백을 했던 근호의 머릿속에는 온통 찬란한 봄 계획이 가득했던 것이다. 여자친구와 꽃길을 거닐고, 놀이공원에 가고, 장미와 향수와 키스를 선물하는 낭만적인 스무 살의 성인식을 치르는.


“성인식이라… 그런 낭만적인 계획을 다 하고 있었냐?”

“뭐… 다들 상상해보는 거 아니냐?”

“그래?”

완주는 예의 그 털털한 웃음을 씩 웃었다. 근호는 완주에게서 그 표정밖에는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다른 표정을 보았다. 작년 봄이었던가. 동아리 새내기들끼리 서울대공원에 갔던 적이 있었다. 지금보다 인원도 많았고, 이제 갓 친해져서 서로를 깎아내리는 재미에 한껏 빠져있을 때였다. 그때는 완주도 어설프게 대학생티를 내느라 지금보다 오히려 더 나이 들어 보였던 것 같다. 단발머리에 얇은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못생긴 축에 속했던지라 그저 새내기여서 받는 관심 정도 외에는 주목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남자아이들은 그날 지혜 때문에 초비상이었다. 긴 생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가냘픈 그 아이가 대공원을 걷던 중에 갑자기 얼굴이 하얘지면서 주저앉았다. 근호는 남자 동기 세 명이 지혜 옆에 붙어 앉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여자 동기들에게 음료수를 사 오자고 했다.


“장완주, 힘깨나 쓸 거 같은데 같이 갈래?”

“뭐? 참나. 그래.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완주는 씩씩하게, 혹은 씩씩거리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런데 근호가 막 따라가려고 할 때 여자 동기들이 근호에게 뭔가 소곤거렸다. 모종의 비밀협의 후에 근호가 조용히 완주의 뒤를 따라갔다. 뒤에 남은 동기들은 숨을 죽이며 둘을 지켜보았다. 완주 뒤에 바짝 다가선 근호는 완주의 팔을 터프하게 잡으며 목소리를 깔고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뒷모습에 반했어요. 전화번호 좀…”

아마도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황홀한 기대감에 사로잡힌 완주의 뒤돌아선 얼굴이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완주는 거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꺼져!”

당황한 근호가 제 목소리로 “야, 장완주!”하고 부르자, 그제야 완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완주의 얼굴은 뭐랄까… 안개가 걷히고 드러난 황무지 같았다. 애써 숨기려 했던 수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공허한 환멸을 채우고 있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근호는 더 당황했다. 마치 정통 멜로물에서 비련을 연기하는 개그우먼을 보는 것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완주는 근호와 그 뒤의 동기들을 보았다. 모두가 같은 표정이었다. 완주는 문득 현실로 돌아온 것처럼 씩 웃었다.

“다 들리거든!”

그러더니 또다시 씩씩하게, 혹은 씩씩거리며 앞장서 걸었다. 금세 완주에 대한 현실로 되돌아온 근호도 허세를 부리며 완주를 쫓아갔다.

“아, 목소리를 더 깔았어야 하는데. 야,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 멋대가리가 없냐? 좀 속아주기도 하고 그러지.”

“내가 멋대가리가 있으면 곤란할 걸."


그 후로 완주는 머리띠를 내던지고 짧은 더벅머리에 낡은 청바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녔다. 완주가 털털해질수록 별명이 늘어났다. 딱부리, 머털이, 사오정, 버섯돌이, 철이, 둘리… 선배들은 완주를 남동생처럼 험하게 다뤘다. 완주도 남자 선배나 동기 누구에게건 애교를 부리거나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저 씩 웃을 뿐, 여자도 남자도 아닌 어중띤 지역에 혼자 있었다. 1학년 내내 새내기들 간에 혹은 새내기들과 선배들 간에 정신없는 사랑의 작대기가 오고 갔다. 누군가는 이어지고, 누군가는 빗나가고, 누군가는 이어졌다가 깨지고 다시 이어지기가 되풀이되었다. 그 와중에 동기들이 한두 명씩 떠나고 절반 정도만 남았다. 완주는 그 모든 것에서 멀었고, 그리고 살아남았다. 근호는 간혹 완주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뒷머리를 긁으며 씩 웃는 완주의 개구진 웃음 때문이었다.


근호는 문득 궁금했다. 이 자식도 여잔데 설마...

“완주 너는 좋아하는 사람 없냐?”

“없어."

단칼에 대답이 돌아왔다.

“동아리에 좋은 선배들 많잖아. 없는 거야, 아니면 마음을 닫은 거야? 아니면 너 혹시…”

완주가 여전히 씩씩하게 걸으며 이상하다는 듯이 근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하는 그건 아니니까 됐고… 그냥… 관심도 없고, 여유도 없어.”

“여유는 무슨 여유. 에이 말해봐.”

완주는 고개를 들어서 대로변의 문 닫은 가게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가게들 안에 있는 거 보이지? 내가 저런 거 입은 모습이 상상이 되냐?”

아현동에서 이대역으로 가는 길은 온통 웨딩드레스 샵들이었다. 갖가지 디자인의 웨딩드레스들이 컴컴한 가게 안에서 조명을 받아 낮보다 더 반짝거렸다. 근호는 갑자기 지혜가 떠올랐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지혜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게 이유야?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이 상상이 안 돼서 남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너무 나간 거 아니야?”

"... 업어줘. 다리 아파."


근호는 두어 걸음 걷다가 멈춰 섰다. 완주에게서 들어본 적이 없는 귀에 설은 단어들이 뇌에 도착했다가 접수를 거부당한 딱 그 시간만큼의 관성이었다. 업어줘? 아파? 술이 확 깼다. 완주는 두어 걸음 뒤에 멈춰 서있었다. 백팩 끈을 양손으로 하나씩 잡고 길 가운데 서서 삐딱하게 쳐다보고 있는 완주는 지가 좋아하는 액슬 로즈보다도 예쁘지 않았다. 할 말을 잃은 근호의 얼굴에 언뜻 낭패감이 스쳤다...고 완주는 생각했다.


"푸헤헤헤헤! 그거 봐. 너무 나간 거 아니지? 자, 가자."

얼떨떨한 근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완주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뭐야... 장난이야? 장난이지?"

"당돌 빠따지. 이 정도 걷고 다리 아플 정도면 이름 갈아치워야지."

"어디서 그런 걸 배웠어? 한 번만 더 그런 장난 치면 가만 안 둬."

근호는 짜증을 부리며 뒤쫓아왔다. 헝클어졌던 궤도가 제 자리를 찾은 듯 둘의 걸음은 이내 다시 리드미컬해졌다.

"야, 나도 싫다... 내 입으로 말해놓고 내 속이 다 느글거리네."


이대역을 지나 신촌으로 접어들 때까지도 근호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자꾸 경계하는 듯 곁눈질하는 걸 느꼈는지 완주가 말을 꺼냈다.

"학교가 여대라서 편한 게 딱 하나 있어."

"그게 뭔데?"

"내가 여자이지 않아도 된다는 거. 일단 들어오고 나면 뭐, 다 여자니까 굳이 내가 여자라는 걸로 손해 볼 일도, 이득을 볼 일도 없잖아. 어필할 필요도 없고, 숨길 필요도 없고."

"그럼 동아리는 불편해?"

"뭐... 그렇진 않아. 나름대로 내 자리를 찾은 거니까. 얼마 전에 의정부에 채준오빠 면회 갔다 왔잖냐. 늙어서 군대 갔다고 혜영이랑 지혜랑 엄청 불쌍해하길래 셋이서 같이 갔었지. 면회 신청하고 나서 기다리는데 선배가 무지 빨리 나오는 거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냐고 하니까, 오빠가 막 웃으면서 ‘여자들이 왔다는데 빨리 와야지.’ 하더라. 근데… 그게 너무 어색했어. 나 여자인가? 어째 낯설더라.”

“무슨 말이야?”

“나한테는 이제 더 필요없는데, 갑자기 주워다가 떠넘기는 것 같은 느낌? 괜히 거추장스럽게. 하아... 그나저나 다음 주 모임은 어디서 하냐… 그냥 가톨릭 회관에서 하고 움직이면 좋겠는데. 난감하네.”


근호는 입을 다물었다. 완주네 학교 앞이지만 서울 토박이인 근호가 완주보다 더 아는 곳이 많았다. 하지만 아마 완주는 혼자 여기저기 들쑤시며 알아볼 것이다. 어쩐지 근호가 가만히 있는 것이 완주를 도와주는 건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완주는 머릿속이 온통 동아리 생각, 회비 걱정, 장소 섭외 걱정으로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까 근호가 ‘동아리랑 결혼해서 정절을 지키는 중’이라고 말한 것은 그런 뜻이었다. 그러니 완주와 함께 총무 스텝을 맡은 근호는 거의 스텝으로서의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둘은 신촌을 벗어나 홍대 쪽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거리를 달리는 차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완주의 걸음 속도는 전혀 늦춰지지 않았다. 갑자기 근호는 아까 완주에게 당한 걸 갚아주고 싶어졌다.

“그나저나 너 진짜 힘 좋은 거 같애. 잘 걸어.”

“칭찬이냐? 고맙다.”

“작년 겨울 엠티 생각나냐? 너 방문 부순 거?”

완주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근호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이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아야! 이것 봐! 진짜 제대로 까네."

"그니까 왜 그 얘기를 또 꺼내! 안 그래도 새내기들이 어떻게 그 얘길 들었는지 나한테 맨날 문짝 뽀갠 선배 맞냐고 한단 말이야!”

"넌 말이야, 뭐든지 너무 열심히 해서 탈이라고. 남들 눈에는 과해 보여. 그 날도 술래 피해서 살짝 도망가다가 잡혀주면 될 걸 전력질주를 하니까 속도 조절도 못 하고 문짝 넘어뜨린 거 아냐!”

“야, 술래가 진필 오빠였잖아. 완전 특전사 티 나게 다 때려잡을 것처럼 달려오는데 나도 모르게 겁이 나더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들 죽는다고 웃고만 있었어. 너는 짜샤, 일으켜 준다면서 문짝 괜찮냐고 물어보는 매너는 또 뭐냐?”

근호는 클클대며 웃기만 했다. 이젠 제대로 두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밤공기가 싸늘해졌다. 완주는 이제사 제대로 심호흡을 했다. 봄날의 달뜬 낮 공기는 어쩐지 자신과는 맞지 않았다. 조금만 걸으면 합정역, 거기서 근호가 가면 오늘 계획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아무도 모르게. 완주는 또 혼자서 씩 웃었다. 처음엔 어색해서 수백 번 연습했던 그 웃음이 이젠 몸에 뱄다. 옆에서 걷고 있는 근호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 녀석에게는 뭐라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서울이라는 이 낯선 도시, 구석구석 차원이 낯선 이 공간에서 근호는 완주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그러나 가깝다는 것은 단지 위치값일 뿐, 근호에게는 할당된 궤도가 있었다. 완주가 빛이든 암흑이든, 뜨거움이든 차가움이든 근호는 아마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이 녀석에게 봄은 그저 고백한 사랑의 응답에 대한 끝없는 기다림과 꽃구경과 성인식의 달콤한 상상일 뿐이다. 제 계절을 그대로 살고 있으니 그대로 놔두는 편이 좋겠지. 근호는 겨울에 묶인 채 부유하며 살아가는 완주와는 다른 차원에 속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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