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공통주제 <봄> ㅣ 화이
어느 날 미드를 보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땅고를 매개로 한 드라마가 있으면 많은 이들에게 땅고라는 춤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작가 프로필 ㅣ 화이
아르헨티나 땅고 댄서이자 땅고 아카데미 '엘 불린' 대표
도서 '탱고레슨' 저자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었다. 요 며칠 화창하고 더운 날씨가 거짓말이었던 것 처럼 바람도 열기가 식었다. 여자는 넋 놓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무실 앞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목련이 어느새 누렇게 잎을 떨어뜨린 채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여자는 목련을 보며 내일 모레면 불혹의 나이가 되는 자신을 떠올렸다. 젊었을 때 생기 발랄하게 인기를 누렸던 기력이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처럼 흐린 날이면 몸이 찌뿌둥하면서 기분도 같이 가라앉았다. 무심코 시계를 보았다. 3시 30분.
"아차, 은행 문 닫기 전에 빨리 가야겠네."
여자는 의자에 걸려 있던 점퍼를 입고 손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녀의 사무실은 달랑 책상이 두개 있는 오피스텔이었다. 다른 책상 하나는 비어 있었다. 직원인 김군이 감기를 심하게 앓아 결근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책상에 붙어 있는 노란색 포스트잇이 눈에 띄었다.
'4월 27일 M호텔 세ㅇㅇㅇ 골프동호회' 피에릭 페드롱'
열 명 가까이 두고 있던 사무실은 지난 5년간 조금씩 축소되어 지금은 김군과 그녀 둘만 남았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이런 작은 행사조차 고맙기만 했다. 조그만 소그룹 파티라 김군의 결근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사무실 문 옆에 있는 거울을 흘낏 쳐다보고 그녀는 문을 열고 나섰다.
은행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의 차례가 왔을 때 창구로 가니 앳된 청년이 앉아 있다.
"유로 사려구요."
신분증과 함께 조금 전에 자동화 기기에서 찾아온 현금 봉투를 건네면서 그녀가 애교 있게 덧붙였다.
"우대 좀 잘 해 주세요."
"이 사진 본인이세요?"
그가 물었다. 신분증에는 15년이 넘은 예전 사진이 붙어 있다. 밝은 갈색의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발랄한 여자가 웃고 있었다. 그래, 지금 모습과 많이 다르다는 거 알아,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녀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옛날 사진이예요."
"무슨 댄서 이런거 하셨나 봐요?"
"뭐, 비슷해요."
"와, 정말요? 무슨 댄스요? 벨리 댄스 이런건가요?"
"아뇨..."
여자는 사진을 찍었을 당시를 떠올렸다. 그 무렵 그녀는 기획사에서 걸그룹 가수를 지망하던 연습생이었다. 앨범이 나오기 직전에 팀이 깨지면서 무산이 되고 말았지만, 무명 시절에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행사도 많이 뛰었었다. 아직 유명세를 타기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설 때마다 관객들이 보내주던 환호와 눈부시던 조명을 그녀는 오래오래 그리워 했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벤트 대행사를 차렸다. 무대에 설 수 없는 대리만족을 하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방송댄스 같은거 했었어요."
"와, 근사한데요."
여자는 그제서야 창구 직원을 쳐다보았다. 뽀얗고 젊음이 통통 튀는듯한 피부에 갸름한 턱선, 살짝 퍼머를 한 듯한 짧은 곱슬머리에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목에는 직원증을 걸고 있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은 뭉툭하고 손톱은 짧게 깎여져 있어 단정해 보였다. 손등에 거뭇한 털이 송송 나 있었다. 여자는 문득 오늘따라 화장도 안 하고 나온 게 생각나서 민망함에 시선을 떨궜다. 갑자기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해졌다. 괜시리 창구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데, 한쪽에 세워진 그의 이름 푯말이 보였다. 박진형. 갑자기 그가 물었다.
"저희 지점 처음 오시는건가요?"
"아뇨, 자주 왔는데요."
"그런데 저는 처음 보시는 거구요?"
"네. 새로 오셨나 봐요?"
"아뇨, 저 일한지 일년이나 됐는데요."
"아.... 아마도 일년 밖에 안되어서.... 전에는 다른 여자분이 앉아 계셨었는데 안보이네요."
"네...."
그가 대답을 흐리면서 화면을 들여다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물었다.
"여행 가시는 거세요?"
"아뇨, 행사가 있어서요."
"아, 외국인한테 지불하시는거예요?"
"네, 프랑스 연주가예요."
"와, 멋지네요. 여기에는 그냥 관광이라고 적을께요. 여행지는 프랑스...."
"환전 할 때 그런것도 적어야 돼요?
"네, 원래 다 적어야 해요."
"지금까지 한번도 적은 적이 없었는데요."
"환전 하는 일이 많으신가 봐요."
"좀 돼요. 아무래도 일 때문에요."
여자는 물끄러미 그의 모습을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보통 은행에 와서 이렇게까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는데, 보통 이런 식으로 일을 하곤 하나, 아니면 나한테만 이러는건가....'
은행 상사로 보이는 이가 그의 뒤를 지나가면서 힐끗 쳐다본다. 이 남자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 다른 선입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여자는 궁금해졌다. 화면을 한참 들여다 보던 그가 카달로그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환율 우대 받으시려면 이 상품에 가입하시면 70%까지 우대 돼요. 직장 있으시죠? 세금 증명서만 떼 오시면 돼요."
"그럼 오늘은 가입 안되는거네요?"
"네, 오늘은 제 선에서 최대한 해드리지만, 다음에 또 환전 하실일이 있으시면 꼭 가입하세요."
어쩌면 단순히 상품 권유를 위한 호객행위일 수도 있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이렇게 나이가 어린 남자애와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자와 여자간에는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존재하는 게 세상을 사는 데 재미를 부여하는 법이지 않은가. 여자는 그의 어설픈 수작에 착각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경계의 날을 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얼마 전 본 영화에서 동사무소 아가씨에게 홀딱 반해서 매일 찾아가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가 여자손님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해도 여자가 계속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거 아닌가. 서로 마음에 들었다면 여자가 일부러 창구에 얼굴을 비치기를 기다리겠지. 만약 여자가 자주 나타나면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진도를 나가겠지. 그가 유로를 가지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녀는 혼자서 상상의 나래 속으로 빠져들었다.
"자, 여기 오천육백 유로, 아니 사천 육백 유로입니다."
어쩐지 용기가 난 여자가 농담을 걸었다.
"오천유로 주시면 큰일나요."
"네, 그럼 제가 짤리겠죠."
그와 그녀는 같이 키득거리고 웃었다. 돈과 서류를 가방에 넣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가 덧붙였다.
"이 안내서 가져가셔서 보시고 다음에 꼭 가입하세요."
"그럴께요."
"저한테 오셔야 돼요."
"번호 순서대로 하는데 어떻게 와요?"
"저한테 볼일 있다고 하고 바로 오세요. 이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이렇게요."
끝까지 신선한 멘트를 날리는 그를 보며 여자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의 미소를 보며 그녀는 화장을 안한 민낯의 민망함도, 촌스러운 점퍼차림의 행색도 잊었다. 그녀 역시 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지금 은행 마감시간이 끝나서 정문은 셔터가 내려가 있거든요. 저 왼쪽에 있는 문으로 쭉 나가시면 돼요."
"네,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여자는 시선을 의식하면서 사뿐사뿐 걸어서 노란 철문이 보이는 통로로 들어섰다. 뒤에서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 어머니. 거기가 아니구요, 그 앞쪽으로 가셔야 돼요."
그녀는 망치로 머리를 엊어맞은 것처럼 눈앞이 하얘졌다. 민망한 마음에 허둥지둥 문을 열고 나왔다. 빌딩 밖으로 나온 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늘에서 가벼운 빗방울이 머리 위로 하나 둘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