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내 작은 아이에게

공통주제 <편지쓰기> ㅣ 화이

by 한공기
화이 프로필.jpg 땅고댄서


어느 날 미드를 보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땅고를 매개로 한 드라마가 있으면 많은 이들에게 땅고라는 춤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작가 프로필 ㅣ 화이

아르헨티나 땅고 댄서이자 땅고 아카데미 '엘 불린' 대표

도서 '탱고레슨' 저자




아이야. 참 오랜만이지? 그동안 소원해서 미안해. 사실 너를 생각 안 했던 건 아니었는데, 사는게 각박하다는 핑계로 너에게 이야기 할 마음을 먹기가 힘들었단다. 마침내 이렇게 펜을 들고 보니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기억나니? 어렸을 때 너는 영특하고 똑 부러지는 아이였어. 말을 떼는것도, 걸음마도 빨랐고, 글도 빨리 깨우쳤지. 너보다 훨씬 키가 큰 남자애들을 호통치며 골목대장 노릇을 했었잖니? 그런 네가 어쩌다가 이렇게 자신감 없고 소심한 아이로 변했는지 마음이 아프다. 아마도 많은 전학이 이유 중 하나겠지. 정들었던 돈암동을 떠나 낯선 청담동으로 이사를 왔을 때, 넌 초등학교 2학년인 꼬마 아이였어. 반에서 가장 키가 컸던 네 짝은 무뚝뚝하고 무서웠고, 담임 선생님은 차갑고 냉정했어. 아빠의 부재도 한 몫 했을거야.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알아. 그래도 아빠가 사우디에서 일하시던 3년동안 외롭고 낯선 환경에서 맏딸로서 동생들을 보살피며 밝게 지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다 알고 있어.


3년만에 돌아오신 아빠는 좀 달라지셨지. 아니면 그 전에는 너무 어려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툭하면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시는 아빠가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니. 한번은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4살짜리 막내동생이 넘어져 코가 까져서 돌아왔을 때 아빠가 네 뺨을 때리며 동생도 돌보지 못한다고 화를 내셨지. 사실 동생이 넘어진 게 네 탓은 아닌데, 고작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너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에 혼란이 일었을거야. 그 이후로 누구든 기분이 나빠지거나 하면 네 탓이 아닐까 하고 지레 걱정하는 버릇이 생겼지. 하지만, 이제는 알지? 그게 네 탓이 아니라는 것을... 네가 얼마나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었는지 알고 있단다. 다른 사람의 감정은 너 때문이 아니야. 그건 그 사람들의 문제일 뿐이거든. 너도 모르는 사이 무슨 잘못을 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은 이제 내려놓으렴.


네 마음속에 가장 큰 응어리로 남은 "필요없는 존재" 라는 말도 사실이 아니야. 어느 누구도 널 필요없다고 생각한 적 없단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제 그만 잊어버리렴. 너를 뱃속에 품었던 그때 네 할아버지, 그러니까 엄마의 시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에 갓 스물 한 살이었던 엄마가 뭘 알았겠니. 누군가 불길하다고 한 소리를 듣고 어린 마음에 고민했던거지, 너를 정말 버리고 싶었던 건 절대 아니란다. 엄마가 널 사랑하는걸 너도 알고 있잖니? 네가 무용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빠 몰래 주식을 하면서 뒷바라지를 해 주고 네 편이 되어 주었던 엄마가 너를 버리고 싶었을리가 없지 않니?


아빠는 사실 너에게 기대가 크셨던 것 같아. 어릴때부터 영특한 너를 보며 가문의 영광을 일으켜 세워 줄 천재라고 생각하셨을거야. 의사나 법관이 될 수도 있고, 아빠의 한이 맺힌 서울대를 가 줄 거라고 기대하셨겠지. 그래서 너한테 더 엄하게 책임감과 강한 성품을 만들어 주고 싶으셨던거야. 그게 옳은 줄 아셨겠지. 당신은 그렇게 자랐으니까 그래야 하는 줄 아셨던게지. 하지만 그 때문에 네가 반발을 하고 오히려 공부하기를 싫어하게 될 줄은 모르셨지. 그래서 네가 무용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렇게 반대하고 실망하셨던 거야. 네 공연을 한번도 보러 가지 않으셨던 것도 그만큼 당신의 실망감을 조절할 줄 몰라서 그랬던거란다. 아이야, 너를 싫어해서가 아니야.


네 친구들이 너를 몇 번이나 배신하고 등을 돌렸던 것도 네 탓이 아니란다. 너는 원래 강한 아이었어. 그런데 이런저런 상황 때문에 조금씩 자신감을 잃고 중학교에 가면서부터는 소극적인 아이로 변해버렸지. 하지만 네 마음속은 아직도 강한 에너지가 있었기 때문에 반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애들한테 끌렸던 걸꺼야. 하지만 그 아이들은 좋은 친구가 결코 아니었어. 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놀았지. 남의 우위에 섰을 때의 얄팍한 승리감에 고취된 철 없는 마음 때문이었던거지.


네가 가장 힘든 일을 당했던 바로 그 때, 부모님에게도 사실을 털어 놓을 수 없었던 너의 외로움과 고민을 너무 잘 알기에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구나. 친구들에게 겨우 이야기 했을 때, 그 아이들은 오히려 너에게서 등을 돌리고 소문을 내고 도둑으로 몰면서 너에게 상처를 입혔어. 지금도 네 마음속에 친구가 없다는 생각은 그 때의 상처 때문일거야. 하지만 아이야, 기억해 보렴. 너에게도 좋은 친구들이 있었단다. 마치 남자애처럼 여자애들의 인기를 한데 모았던 세춘이도, 보이조지를 끔찍히 좋아해서 옷차림을 따라하던 지은이도, 반에서 따돌림을 받던 너에게 손을 내밀어 준 수화랑 시원이도 얼마나 좋은 네 친구였니. 그 아이들을 잊으면 안되지. 너를 진짜 사랑해 줬던 네 친구들을 말이야.


연극 연습을 하다가 선배가 이런 말을 한 걸 기억하니? "네가 지금 아픈건 보석이 되기 위해 연마되는 과정인거다." 그 말을 듣고 넌 집에 와서 울었지. 어딘가 마음이 시원했을거야. 그리고 그 말은 지금까지 네가 버텨온 버팀목이 되었지. 심지어 좌우명도 이렇게 지었지 않니? "내일은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고... 그래. 하루하루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에도 넌 보석으로 거듭나기 위해 애써 왔어. 그리고 실제로 지금 누군가에게 넌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었지. 하지만 네 마음은 아직도 상처받은 어린아이 그대로 남아 있었구나.


아이야, 이제는 네 스스로를 사랑하고 믿고 행복해 져도 된단다. 가끔 우울한 생각이 드는것도 자연스러운거야. 마치 날씨가 흐렸다 개는 것 처럼, 그냥 지나가는 일일 뿐인거지. 우울할 때는 우울한대로, 밝은 날은 밝은대로 온 몸으로 받아들여 보렴. 하루하루가 더 소중해 질 테니까. 그리고, 언제나 옆에서 너를 지켜보고 응원하는 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래.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너를 사랑해.

네 앞에 햇살의 따스함과 평온한 행복이 함께 하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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