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인어

단편소설 ㅣ 화이

by 한공기
화이 프로필.jpg 땅고댄서


어느 날 미드를 보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땅고를 매개로 한 드라마가 있으면 많은 이들에게 땅고라는 춤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작가 프로필 ㅣ 화이

아르헨티나 땅고 댄서이자 땅고 아카데미 '엘 불린' 대표

도서 '탱고레슨' 저자




아침부터 명치께가 답답했다. 머리도 아팠다. 에어컨을 너무 쐬어서 그런것 같았다. 은영은 창가로 갔다. 창문을 열자 뜨거운 열기가 훅 밀려왔다. 싱가포르의 하늘은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았다. 은영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직도 그래?"
진수가 옆에 다가와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응, 아무래도 어제 저녁 먹은 게 체했나 봐. 아까 소화제 먹었는데 안 가라앉네..."
"아무래도 오늘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미루는 게 낫겠지?"
"아야....그냥 나 빼고 로라랑 갔다 오지그래?"
은영이 애써 표정을 감췄다. 진수가 의심의 눈초리로 은영을 쳐다보았다

"진짜야, 난 괜찮아. 그냥 둘이 갔다 와."
진수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너 빼고 어떻게 둘만 가냐? 라우라가 오늘 그냥 집에서 수영이나하고 놀자더라. 너도 누워서 쉴 수 있고,너 햇볕 쬐는거 좋아하잖아. 잘 됐지?"
“그래? 잘됐네.”
진수는 로라를 꼭 라우라라고 불렀다. 은영은 그 발음이 어색했다.

로라의 집은 널직한 정원이 있는 이 층짜리 저택이었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펼쳐진 잔디밭 사이로 징검다리처럼 놓인 정방형의 돌길이 이름모를 활엽수들 사이로 뻗어 있었다. 집 뒤편에는 야자수들 사이에 둥근 시옷 모양의 꽤 큰 수영장이 있었다. 풀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선베드가 놓여 있었고, 그 뒤로 햇빛을 피할 수 있는 천막과 의자,테이블이 갖춰져 있었다. 은영은 선글라스를 끼고 선베드에 누웠다. 태양이 거의 머리 꼭대기까지 와 있었다. 은영은 내리쬐는 뜨거운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에어컨의 냉기에 지친 몸이 나른해졌다. 진수와 라우라는 이미 물속에 뛰어들어 있었다. 로라는 수영을 우아하게 했다. 물살을 조용하게 가르며 물방울 하나조차 튀지 않을 것처럼 천천히 팔을 저었다. 그런데도 스피드는 진수에게 뒤지지 않았다. 마치 인어와 같은 그녀의 모습에 은영은 몸을 휙 뒤집었다.

로라가 진수에게 연락한 건 지난 2월이었다. 미국 동부의 대학을 다녔던 진수는 그때 친구들과 여전히 연락을 주고 받았다. 로라는 그 중 한 명이었다. 졸업 후에 싱가포르 사업가를 만나 작년에 결혼을 한 그녀는 뜬금없이 진수에게 놀러 오라고 초청했다. 진수는 오랜만에 로라을 다시 만날 생각수도 있고 여행 경비도 절약할 수 있으니 일석 이조라며 기뻐했다. 은영도 모처럼 해외여행을 경험해 볼 기회였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미국 생활은 우리나라와 달랐으니 남자와 여자가 쿨하게 친구로 지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은영은 생각했다. 남자친구가 좋은 대학을 나온 덕에 이런 여행도 갈 수 있고, 자신은 참 운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비행기가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하고, 세련되고 이국적 느낌이 물씬 나는 공항 내부를 눈이 휘둥그레 구경할 때까지도 그랬다.

"진!!"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금발의 글레머가 뛰어와서 진수를 껴 안았다. 금발머리는 진수의 오른쪽 뺨에 키스를 했다.진수 역시 아무렇지도않게 그녀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였다.

"라우라, 오랜만이야. 이게얼마 만이지? 졸업하고 4년만인가?"
진수와 로라는 유창한 영어로 한참을 떠들었다. 마침내 진수가 은영을 소개했다.
"라우라, 여기 내 여자친구 은영이야."
"만나서 반가워, 은영."
로라가 은영에게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은영도 어색한 영어로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로라는 코의 주근깨를 찡긋거리면서 귀엽게 웃었다. 그녀의 눈은 회색이 도는 파란색이었다. 헐렁한 흰 티셔츠도 큰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무릎까지 오는 청바지 아래로 길고 날씬한 종아리가 쭉 뻗어 있었다. 주차장으로 이동하면서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뒤에서 은영은 걸음을 재촉해 그들을 쫓아갔다.

첫날 로라가 저녁식사 자리로 초대한 곳은 싱가포르 외곽의 한 마리나 클럽이었다. 금빛과 오렌지색의 석양과 가로등의 불빛들이 쪽빛 배경 속의 흰 돛들과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은영은 잠시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시한번 싱가포르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로라의 남편 제임스가 건배 제의를 했다. 제임스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로라와는 나이 차이가 좀 있었다. 키는 작은 편이었고, 은색 테의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빛은 자신만만했다. 처음에는 은영도 유창한 영어로 흐르는 세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 보려고 집중했지만, 곧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가끔 진수가 은영에게 대화의 내용을 요약해서 설명해 주기도 했지만, 모든 대화를 통역해 주기에는 대화 분위기가 너무 빠르게 흘러갔다. 은영은 대화에 끼기를 포기하고 풍경과 음식에 관심을 돌렸다. 음식은 훌륭했다.다양한 식전 빵부터 게살과 아보카도가 들어간 스프링 롤, 계란 노른자와 토마토 퓌레로 맛을낸 관자 요리, 크림소스를 끼얹은 홍합, 캐비어와 트러플오일에 버무린 파스타, 버터와 마늘소스로 맛을 낸 바닷가재 등, 화려한 플레이팅 만큼 맛도 풍부했다.이곳은 멤버쉽으로 운영하는 클럽 레스토랑으로, 아무나 회원으로 가입할 수 없는 곳임에 분명했다. 은영은 그들의대화를 귓등으로 흘리며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 가끔누군가와 눈이 마주칠 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다음 날, 진수와 은영은 싱가포르의상징인 머라이언을 보러 나섰다. 제임스는 일찌감치 출근을 하고 없었다. 탱크톱과 반바지에 커다란 챙이 달린 모자까지 쓴 로라가 이미 현관에서 그들을 재촉했다.
"로라도 같이 가?"
은영이 물었다. 진수가 대답했다.
"응, 라우라가 가이드 해 준대. 아무래도 우리보다 싱가포르에 대해 잘 아니까 잘 됐지 뭐."
"로라는 직장 안 다녀?"
"남편이 잘 버니까 일 할 필요가 없대. 어차피 제임스 직업 때문에 여기저기이사 다니면서 살았으니까 직업 가지기도 쉽지 않았겠지. 여기서는 정착할 것 같으니까, 모르지. 앞으로는 일을 하려나?"
그 때 방 밖에서 로라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진! 준비 다 됐어? 오늘 점심은 어떤 걸 먹고싶어? ........"
방문을 나서자마자 진수와 로라는 점심 메뉴와 일정에 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은영은 아무 말 없이 라우라의 크림색 크라이슬러 뒷자리에 올라탔다. 진수는조수석에 앉았다.

머라이언은 생각보다 작았다. 바다를 내려다보며 폭포 같은 물을 뿜는 거대한 사자를 상상했던 은영에게 실제의 머라이언은 젠틀하고 앙증맞기까지 했다. 은영은 살짝 실망했다.
"진, 거기 거 봐. 내가사진 찍어 줄께. 노노, 그거 말고, 다른 포즈. 물 받는 포즈."
로라는 카메라를 들고 호들갑을 떨었다. 진수는 머라이언의 입에서 뿜어지는 물을 손으로 받다가 아예 입으로 받아 마시는 포즈를 취했다. 로라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포복절도했다. 은영도 그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웃었지만, 물받는 포즈는 끝내 사양했다.

로라는 일정 내내 가이드로 따라 나섰다. 리틀 인디아를 갔을 때도, 칠리크랩을 먹을 때도, 나이트 사파리도 함께 했다. 제임스는 첫날 저녁을 함께한 것을 빼고는 일정 내내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바쁜 비즈니스맨 답다고 은영은 생각했다. 라우라가 진수를 초대한것도 사실은 너무 바쁜 남편 때문에 혼자서 심심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진수에게는 말하지않았다.

은영은 친절한 로라가 고마웠다. 아니 고마워야 했다. 로라 덕분에 여행 내내 숙박비뿐 아니라 교통비도 부담도 덜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비싼 저녁도 얻어먹었고, 현지인들만아는 쇼핑코스를 가 봤다. 이보다 더 편하고 실속있는 여행은 없을 터였다. 단, 둘의 대화에 낄 수 없다는 답답함과, 진수와의 오붓한 시간은 잠잘 때 빼곤 없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은영이 생각했던 첫 해외여행은 이런 게 아니었다.

"진, 네가 정말 좋은 여자를 만난 것 같아서 기뻐. 진심이야."
사흘째 되던 날인 어제, 로라가 점심을 먹으면서 말했다. 진수가 대답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제임스는 정말 좋은 사람 같아. 네가 원하던 그런 남자를 드디어 만났네."
잘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가 그 순간만큼은 선명하게 들렸다. 진수의 말에 로라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었다.

그날 밤에 은영은 침대 위에서 진수에게 물었다.

"솔직이 말해 봐. 전에 둘이 사귀었던사이지?"
진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약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대학때잠깐 사귀었던 건 맞아. 하지만 헤어지고 지금까지 친구로 지냈어."
"얼마나 사귀었는데?"
"음....1년 반? 2년정도?"
진수의 대답은 스스럼 없었다.
"....역시 그랬구나. 사귀던 사람이랑 헤어졌는데 계속 친구로 지내는 게 가능해? 신기하다."
"좋은 사람이니까 친구로라도 지내야지. 좋은 사람을 잃는 건 아깝잖아."
"근데 왜 헤어졌는데?"
"그냥....둘이 잘 안 맞았어."
진수는 하품을 했다.
"혹시 로라가 아직도 자기 좋아하는 거 아냐?"
진수는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냐.....오랜만에 봤으니까 그렇지....얼른자...."
진수는 이윽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은영도 눈을 감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며 실타래처럼 엉겨 붙었다. 은영은 형태가 불분명하면서 끈덕지게 달라붙는 그것들을 떼어내려고 한참을 뒤척였다.

"아, 시원해. 은영아, 너도 들어가서 수영해 봐.."

진수의 목소리에 은영이 눈을 떴다. 얼마나 오래 햇볕을 받고 있었는지 등이 따가웠다. 눈 앞에 진수가물이 뚝뚝 떨어뜨리며 서 있었다. 수영을 좋아하는 진수는 어깨가 딱 벌어지고 팔이 길었다. 근육질은 아니지만 적당히 근육의 선이 살아있는 탄력 있는 몸이었다. 은영은 부시시 일어났다. 가슴골에 송송 땀이 나 있었다. 물에나 들어갈까 하고 풀을 쳐다보니 로라도 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수영복 위로 부풀은 가슴이 출렁이듯 흔들렸다.
"좀 쉬어야겠다. 진, 칵테일마실래? 은영은?"
"아, 고마워. 난 진저에일로."
진수가 대답했다. 로라는 은영을 쳐다보았다. 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로라가 집을 향해 몸을 돌리자 티팬티 사이로 그녀의 둥글고 탄탄한 엉덩이가 터질 것처럼 드러났다. 은영은 고개를 돌렸다. 로라는 엄마가 아이리시계이고 할아버지가 스페인 사람이라고 했다. 남미의 피가 섞여서인지, 그녀는 볼륨있고 탄력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저 몸을 끌어안고 있었을 진수를 상상했다. 은영은 벌떡 일어나서 물로 뛰어 들었다.
"시원하지? 수영 연습 좀 해. 하하하"
진수가 뒤에서 소리쳤다. 은영은 눈과 콧속으로 들어온 물을 핑계로 진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은영은 물이 무서웠다. 수영장에 가면 제자리에서 참방거리거나 천천히 걸어 다닐 뿐이었다. 언젠가 수영장에서 튜브도 없이 물에 떠 있는아이들을 보고 놀라서 진수에게 말했었다.
"와, 저 애들 좀 봐. 발이 안 닿을 텐데 튜브도 없이 잘 노네. 어떻게 저렇게 물에 떠 있을 수가 있지?"
진수가 대답했다.
"모든 사람은 몸 속에 튜브가 들어있어서 다 물에 떠 있을 수 있어."
은영은 충격을 받았다. 적어도 자신은 그 모든 사람 속에 속하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은영은 물속에 가라앉았다. 진수도 결국 포기한 듯이 이렇게 말했었다.
"넌 수영 말고 잠수를 해야겠다."
은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혼자수영장에 가서 인터넷에서 본 대로 발장구 연습을 하고 숨 쉬는 연습을 했다.마침내 잠시나마 물에 떠있을 수 있게 되자 그녀는 자유형에 도전했다. 하지만, 숨을쉬려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릴 때마다 물을 같이 먹어서 실패하곤 했었다.

은영은 크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물속에 집어넣으면서 발로 벽을 밀었다. 몸이 부드럽게 물살을 가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팔꿈치부터 팔을들어 올려 천천히 저었다. 세 번째 오른팔을 들면서 숨쉬기를 시도했다.성공이었다.다시 한 번, 두 번, 세 번째 팔을 들면서 숨을 쉬었다. 이번에도 물을 먹지 않고 숨을쉴 수 있었다. 물살은 부드러웠고 시원했다. 보통 이렇게잘 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의구심이 들어서였을까.세 번째로 숨을 쉬려고 고개를 틀었을 때 그녀의 얼굴은 물밖에 있지 않았다. 순간 당황했다. 다시 한 번 시도했다. 찰랑찰랑한 몰결이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 숨이 차서 억지로 턱을 들어 숨을 내뱉은 순간 물이 기도로 들어왔다. 기침이 터져 나오면서 몸이 무거워졌다. 더 이상 수영을 지속하는건 무리였다. 그녀는 포기하고 일어섰다. 그런데 바닥에 발이닿지 않았다. 은영은 당황해서 팔과 다리를 바둥댔다. 안간힘을 쓸수록 몸이 가라앉았다. 입과 코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콧속으로 파고드는 물이 바늘처럼 따가웠다. 진수 쪽을 바라보려 했지만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물속에 잠기면서 은영의 시야에 로라와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로라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아득히 들렸다. 그녀의 발 맡에는 검은 죽음이 커다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부모님,친척들과 함께 놀러 간 여름 바닷가에서 그녀는 아기용 튜브를 허리에 끼고 낮은 물가에서 놀고 있었다. 갑자기 크게 몰려온 파도에 그녀의 튜브가 휩쓸리면서 그녀는 모래밭 쪽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튜브가 뒤집히면서 그녀의 몸도 뒤집혀서 물속으로 쳐박혔다. 어떻게 그녀가 구조되었는지 기억 나지 않아도 물속에 얼굴이 처박혔던 순간은 선명했다. 비로소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물을 좋아했다. 산보다는 바다를, 강가를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물에 들어가는 것은 끔찍하게 싫어했다. 수영장에 놀러 갈 때마다 친구들이 물싸움을 하면 겁이 나서 도망 다녔고, 장난이랍시고친구들이 얼굴을 물속에 넣고 누르면 온몸의 힘이 다 빠지곤 했었다.
"바다는 밖에서 바라볼 때가 좋은 거야. 그 소금물에 들어가고 싶지는않아."
은영은 해변에 놀러 갈 때마다 물에 들어가서 놀자고 재촉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말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일광욕만 할 뿐, 물속에서 노는친구들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특히 바닷물에는 절대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이제는 알았다. 그녀는 가끔 피곤하다는 핑계로 화장도 안 지우고자 버리곤 했었다. 사실은 그것도 세수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해했다. 얼굴에 물이 닿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깨닫지 못했던 공포였던 거다.

갑자기 세상이 조용해졌다. 이제는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지만, 그녀가 적막을 편안하다고 느낀 순간 몸의 고통이 아득히 멀리 있는것처럼 생각되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태고의 우주 태동 같은 소리뿐이었다. 아니, 엄마의 자궁 안에서 들었던 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자궁암으로 돌아가신 지 벌써 5년이나 지났지만, 그녀는 아직도 때때로 엄마가 그리웠다. 사별 이후 술만 마시는 아빠와 동생들 앞에서 은영은 맘 놓고 울지도 못했었다.

그리고 현재, 옛 여자에게만 정신을 팔고 있는 남자…. 진수는 항상 그랬다. 늘 눈치가 없었고 한 템포 느렸다. 그런 그에게 얼마나 상처를 입었었던가. 은영에게 둔감한 그를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았기 때문일 거라고 그녀는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가 진짜 운명의 상대라면 지금 그녀 혼자 외롭게 물속에 있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은영은 살며시 눈을 떴다. 눈이 시렸다. 그래도 은영은 눈을 감지 않았다. 검은 죽음의 아가리 속이 아니라 짙고 밝은 파란 세상이었다. 금빛 물고기들이 그녀를 감싸며 너울거렸다. 저 위로 황금색 공이 떠 있었다. 내가 태양에게 빨려 들어가는 건가, 아니면 태양이 나를 덮는 걸까.

순간 해가 크게 일그러졌다. 무언가가그녀의 몸을 확 낚아챘다. 몸이 갑자기 무거워졌다고 느끼는 순간 눈앞이 하얘지더니 깜깜해졌다가 빨간빛으로변했다. 온몸에 뜨거운 열기가 쏟아졌다. 머리속에 진공관이울리는 것처럼 먹먹하던 느낌이 차츰 선명해지면서 날카로운 통증으로 바뀌었다.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콧속과 가슴 안쪽이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입과 코에서 물이 줄줄흘러나왔다. 눈에서도 물이 흘렀다. 납덩이 같은 팔에 힘이들어가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이젠 괜찮아. 괜찮아. 다지나갔어.”
은영을 토닥이며 진수가 말했다.

깨어보니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은영은 눈을 뜬 채로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주방 쪽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지만 은영은 듣고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변했다. 마침내 그녀는 부시시 일어났다. 은영이 주방으로 들어가니 로라가 벌떡 일어났다.
"은영, 이제 괜찮아? 배고파? 저녁 먹을래?"
은영은 고개를 저었다. 진수를 보고물었다.
"여기 혹시 맥주 있어?"
"맥주 할까?"
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자."
진수가 식탁에서 일어섰다. 따라일어서려는 로라에게 진수가 말했다.
"둘만 나갈께.”
로라는 잠깐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은영과 진수가 도착한 곳은 마리나 베이였다. 57층 셀라비 바의 테라스 옆에 자리를 잡았다. 밤바람이 상쾌했다.맥주를 시키고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진수씨.”

은영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난 착하게 살려고 참 노력한거 알지? 좋은 딸이려고 했고, 엄마 역할까지 하는 누나이려고 했어. 자기한테도 어질고 착한 아내이고 싶었어. 그런데 갑자기 우유부단하고 수동적인걸 착한걸로 착각하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어.”

진수는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

“나는 여전히 착한 사람일거야. 하지만, 동시에 자기한테 존중받고 싶어. 내가 배려하는 만큼 나도 배려 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말 하지 않아도 알아주면 좋겠지만, 자기는 그런쪽으로는 너무 둔감해서 내 맘이 어떤지 정도는 말 해 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

진수가 말했다.

“내가 언제 너를 존중하지 않았다고 그래?”

은영은 슬픈 눈빛으로 진수의 뺨을 쓰다듬었다.

“진수씨, 나는 여기까지 여행 와서 자기가 나 보다 엑스하고만 지내는 게 참 섭섭해.”

“엑스라니, 라우라는 그냥 친구야.”

“아무리 친구라도 그렇지. 자기 나보다 로라랑 더 얘기 많이 하고, 늘 로라랑 같이 있잖아. 우리둘이 첫 해외여행인데 나는 자기랑 더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단 말야. 자기는 안 그래?”

“나도 그래. 그래서 여기도 우리 둘만 왔잖아.”

은영이 샐쭉한 표정으로 진수를 흘겨 보았다.

“남은 시간은 좀 더 둘이 보냈으면 좋겠어. 우리둘만의 추억을 만들고 싶어.”

“그래, 알겠어. 그러자.”

“그렇다고 로라랑 친구하지 말란 말은 아니야.나 그 정도로 속 좁은 여자는 아니라구. 단지 나한테 좀 더 신경을 써 달라는 말이지.”

“알았어. 무슨 말인지 이해 했어.”

맥주가 왔다. 은영은 단숨에 꿀꺽꿀꺽 반 정도를 비웠다.

"그런데 인어는 어떻게 물속에서 숨을 쉴까?"
은영이 물었다. 진수는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갑자기 인어는 왜?"
"물고기처럼 아가미가 있는 것도 아닌데. 허파가 다르게 생겼나?"
진수가 웃었다.
"물속에서도 숨을 쉬고 얼마나 좋을까. 난 그깟 수영도 못해서 이 난리인데... 진수 씨는 수영 잘해서 좋겠다."
은영이 한숨을 쉬었다.
"수영하는 게 부담스러우면 스노클링을 해 보면 어때? 그럼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잖아. 인어처럼."
"스노클링?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어. 무섭지 않을까?"
"글쎄, 바닷속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긴 한데....아무래도 다시 물 속에 들어가기 아직은 좀 그런가?"
진수의 말에 은영은 가슴이 뛰었다. 에메랄드빛 바닷속에서 물고기들과 함께 헤엄을 친다. 은영이 눈을 반짝였다.
"아니, 나 해보고 싶어."
"그럼 내일은 스노클링에 도전해 볼까? 우리 둘만."
"우리 둘만?"
어느새 명치의 답답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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