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공통주제 <호흡> ㅣ 이정민
전 건망증이 심해서 병적으로 기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오전 10시반에서 11시까지 무엇을 했는지, 점심은 무엇을 먹었는지, 물은 몇 잔을 마셨는지...흘러간 시간 속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감정들까지도 세세하게 기록하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이정민
직장인. 성격이 무척이나 쾌활한데 힘든 내면을 보호하기 위한 과장일지도 모름.
최근에 스윙을 배우기 시작했다. 스윙의 몇 가지 춤 중 지터벅을 배운다. 선생님이 ‘걷기를 제대로 못해도 지터벅은 배울 수 있다’고 모집공고에 쓰셨다. 배워보니 걸음걸음 바운스를 타면서 리더의 리딩에 따라 오른쪽으로 돌고 왼쪽으로 도는 춤이다. 흥미를 떨어트릴 만큼 어렵지도, 지루할 만큼 쉽지도 않아 입문자 대부분을 지터벅의 다음 단계인 린디합으로 보낸다.
춤을 배우는 것도, 남자와 짝을 이뤄 춤을 추는 것도 새로웠지만, 강습 이후 소셜 문화가 신기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사람이 타면 구석으로 바짝 붙던 내가 처음 만난 이성을 코앞에 두고 손, 등, 어깨 등에서 오는 리딩을 받아 움직인다. 보통 일상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인지하는 방법인 목소리가 아닌 상대의 체온, 숨소리와 냄새, 느낌 등의 촉각으로 상대방을 인지한다.
처음에는 스윙을 배우는 동호회의 기존 멤버들이 몇 번 잡아주었다. 그 후로, 전에 같이 춰봤던 사람이나 같이 지터벅을 배우는 동기들과 춤을 추게 되는데, 전에는 곧잘 그의 리딩을 받아 잘 따라갔지만 그날따라 그 사람과 잘 안 춰지기도, 저번에는 좀 따라가기 어려웠는데 또 어떤 날은 그 사람과 춤추는 것이 재밌기도 하다. 전의 그와 지금의 그는 같은 사람인데도 말이다.
왜 오늘은 유난히 그와 잘 맞는지/맞지 않는지를 생각해보면 그 사람과 내가 기질적으로 들어맞다기보다는 그 날의 그와 그 날의 내가 우연히 맞게 된 것 같다. 소셜시간에 빠에 있다는 것 자체가 각자가 타인에 대한 7-80의 열린 마음으로 나오는 것인데, 유난히 호흡이 맞지 않는 날은 그 날 내가 2-30의 열린 마음이라던지, 그와 나의 2-30의 닫힌 마음이 맞아 떨어졌다던지.
춤추는 파트너는 춤추는 시간 동안 내 앞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지만, 꽤 오래 만나고 있는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이런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와 만나기로 하던 날부터 한참 동안은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 동안 이 생각을 했다. 그 기간 후로는 오히려 그와 만나고 있을 때 가끔 생각하곤 한다. 밝게 웃으며 밥 먹는 그를 앞에 두고.
당신과 내가 서로를 선택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낭만적인 인연이라 그런 걸까? 인생의 끝에서 증명되어야지 알 수 있는 것을 미리 속단하기는 이른 걸까? 인생의 선택시기인 내 나이에서 몇 년만 지나도 향후 오랜 기간을 같이 갈지 아닐지 알 수 있겠지만 우물쭈물하다 인생의 끝에서 당신이 나의 진짜 인연이 아니란 걸/맞았단 걸 알게 되면 어쩌지 ?
조숙한 누군가는 어쩌면 십대부터, 이십대가 되면 누구나, 삼십대가 되면 여러 조건들로 더 어려워지는 고민.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함께 할 사람을 결정하는 일.
언젠가 읽은 책에서 사랑은 타인이 아니라 본인에서 시작되는 거라는 말을 보았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말이라 머리에 남았고 가끔씩 머리에서 맴돌았다. 내가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을 때 시작되는 것... 그 말인즉슨 내가 그를 만나기 시작했을 때 그건 나의 어떤 점이 그의 마음을 만들어 냈다기보다 이미 그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을 이끌어냈다는 것.
너 없이는 못살아 등의 연인들의 달콤한 말들을 생각한다면 잠깐 속상할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의 어떤 조건으로 인해 그를 사랑하지 말아달라는 연인의 시는 너무나 유명하다. 오히려 그날 그곳에 하필이면 당신이, 내가 있었기에 우리가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어쩌면 더 낭만적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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