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주제에 관한 이야기 ㅣ 화이
어느 날 미드를 보다가 문득, 우리나라도 땅고를 매개로 한 드라마가 있으면 많은 이들에게 땅고라는 춤을 전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작가 프로필 ㅣ 화이
아르헨티나 땅고 댄서이자 땅고 아카데미 '엘 불린' 대표
도서 '탱고레슨' 저자
나는 비교적 오랫동안 땅고를 춰 왔고 가르쳐 왔다. 이 춤을 처음 접했을 때 느꼈던 놀라움과 감동을 잊을 수 없어서 그대로 내 직업으로 삼아 버렸다. 그리고 현재 내 춤 파트너이자 동반자와는 10여년을 호흡을 맞춰 오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법과 동시에 진정한 리드와 팔로우의 개념을 점점 더 이해 해 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실제 우리의 생활은 그러지 못했었다. 춤에서는 서로에게 집중하고 헌신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그걸 제대로 적용하지 못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여러가지 트러블이 자라나게 되었고, 그것이 큰 문제로 불거진 다음에야 단순한 이 법칙을 깨닫게 되었다.
땅고는 커플 댄스이다. 그리고 지구상의 커플댄스 중에서 가장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대표하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춤이다. 춤을 구성하는 방법의 90% 이상이 남자의 리드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두 사람의 커넥션이 없이는 함께 춤을 출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단순하게 남자가 리드하고 여자가 복종하는 춤이 아니다. 그 안에는 좀 더 복잡한 서로간의 교감과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한다. 춤을 통해 남자는 더욱 남자다운게 무엇인지 알게 되고 여자는 여자답다는 게 어떤 것이지 이해하게 된다. 남자답다는 것이 단순히 마초적이고 강한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오히려 여자를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 여자를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한 단호함과 결심이 더욱 남자다움을 이끌어 내게 되는 것이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순종적이고 부드러운 것은 여자다움의 일부일 뿐이다. 여자를 더욱 매력적이게 하는 자신감과 당당함이 남자로 하여금 여자를 더 기쁘게 하려는 마음을 갖게 만들고, 그 모습에서 섹시함이 발현된다.
이 모든것은 두 사람의 커넥션에서 비롯된다. 커넥션이라 하는건 단순하게는 서로에 대한 호감과 공감을 의미하지만, 땅고의 커넥션은 좀 더 깊은 것을 추구한다.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이 동식물들과 '본드'를 만드는 방식을 보면 가장 이해가 빠르다. 땅고를 추기 위해서는 나와 파트너 사이에 보이지 않는 돌기들이 서로 얽혀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이해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춤을 추는 동안에 상대의 감정과 생각, 근육들의 움직임, 호흡 등이 마치 내 몸인것 처럼 선명하게 느껴지게 된다. 이런 커넥션이 없이는 두 사람이 같이 움직이면서 '춤'을 출 수는 있지만, '깊은 교감에서 느껴지는 충만함'을 경험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여기에 땅고만의 치명적인 매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교감을 만드는 데에는 세 단계의 성장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사회에서의 남녀관계의 성장과정과 놀라울 정도로 일맥상통한다.
첫단계는 나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내 몸을 의식적으로 컨트롤 하면서 생활해 본 경험이 거의 없다. 운동선수나 무용을 했던 경우는 제외하기로 한다. 일상생활에서의 우리의 몸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자동으로 움직여져 왔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의지에 반응하는 내 몸의 감각은 둔하기 마련이다. 춤을 춘다는 것은 몸을 음악과 감정에 맞춰서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것을 뜻한다. 단지 땅고를 추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모든 춤의 기초가 내 몸을 알고 조절하기 시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의욕이 앞선다 해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의 둔한 감각을 깨워서 섬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몸을 자유롭게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중심 축을 견고히 잡고 있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파트너와 춤을 출 때에도 서로에게 기대어서 추는 게 아니라 내 몸의 중심을 스스로 잡고 서로에게 호흡을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땅고를 전파하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의 나 역시 땅고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알지 못했던 거다. 나 자신을 들여다 보고 성숙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때의 여러 트라우마로 꼬일대로 꼬인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남자에게 기대려는 심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부담으로 여겨지는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심리 상담을 시작하고, 내 아픈 과거를 들여다보는 고통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내가 얼마나 의존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춤에서 나쁜 습관이 몸에 배면 그것을 고치는 게 새로 배우는것보다 더 힘든것처럼, 나도 내 안에 자리잡은 삐뚤어진 가치관을 잘라내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디어야만 했다. 내 자신이 혼자서 굳건히 설 수 있을 때, 다른 누군가와 함께 동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어릴때 읽었던 홀로서기 라는 글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다가 이제서야 비로소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두번째 단계는 상대에 의해 느껴지는 내 느낌과 반응을 알아가는 것이다.
혼자 움직일 때와 같이 움직일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그래서 혼자 추는 춤과 같이 추는 춤은 다른 차원의 기쁨을 선사한다. 첫번째가 몸을 움직이는 기쁨이라면, 두번째는 소통을 하는 기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움직임에 따른 내 몸의 느낌을 기억하고 상대에게 맞춰서 함께 움직이는 법을 익혀야 한다. 생각보다 많은 인내심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즉, 상대의 움직임 - 내 몸의 느낌을 인지 - 몸의 반응을 기다림 - 내 몸의 움직임 의 단계를 거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섣불리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내가 먼저 가는 오류를 범하게 되거나, 상대의 상황은 생각하지 못한 채 일방적인 리드로 폭력을 휘두르게 되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두 사람의 커넥션이 깨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거쳐 시행착오를 통해서 올바른 반응을 배워야 한다.
남녀간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 누군가와 데이트를 시작하고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소통을 시작한다. 상대의 말 한마디, 일거수 일투족을 통해 마음이 무지개와 폭풍우 속을 넘나든다. 상대의 말과 행동에 내 느낌이 변화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한다. 그런데, 이 역시 땅고와 같다는 것을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 역시 듣고 - 느끼고 - 이해하고 - 반응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상대가 나를 위해 맞춰 주기만을 바랬고, 그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히 여겼다. 때로는 상대의 말을 오해해서 스스로 상처를 받기도 했고, 상대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내 방식대로의 사랑을 강요하고서 받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했다. 상대가 소통의 부재를 이야기 할 때, 나는 내가 받은 상처만 생각했다. 상대가 내 멋대로 춤을 추는 나로 인해 얼마나 외로웠을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이니까 서로 안 맞을 수도 있고 서로가 원하지 않는 것들을 일방적으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통해 상대와 건강한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대응법을 연습하고, 더 깊고 성숙한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었다.
보통 첫번째 단계와 두번째 단계는 병행해야 한다. 처음 땅고를 시작할 때는 둘 다 제대로 될 리가 없다. 하지만 차츰차츰 연습과정을 통해 감각센스와 반응센스가 발전하게 됨에 따라 이 두 단계는 같이 발전하게 된다. 이 두 단계가 어느정도 성숙하게 되면 춤을 추는게 재미있어 지고, 땅고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커넥션에 대해서 다 이해 했다고 생각한다. 남녀관계도 마찬가지다. 이 두 단계는 함께 성숙하고 발전되어야 한다. 내 중심이 잘 서 있게 되고 상대에 대한 대응도 노련해지게 되면 어느 누구를 만나도 원만하고 큰 트러블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연애상태가 안정되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단계는 바로 세번째 단계로,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상대방만 느끼고 생각하는 단계이다.
땅고의 커넥션은 X자 모양을 하고 있다. 내가 나를 잘 컨트롤 하면서 상대를 만나서 함께 움직이는 게 아니다. 이렇게 춤을 추면 두 사람간의 미묘한 시간적 간격의 어긋남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상태로도 같이 즐겁게 춤을 출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단계의 즐거움에서 만족을 한다. 하지만, 진짜 깊은 맛을 보지 못한 단편적인 소통일 뿐이다. 진짜 교감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춤을 출 때 나 자신이 사라지는 단계, 내 안에 상대방만 존재하는 상태이다. 상대의 근육의 섬세한 움직임, 음악에 따른 심장 박동의 변화, 호흡의 깊음, 감정의 섬세함만이 내 안에 존재한다. 음악 조차 내 귀로 듣고 있지 않다. 상대가 듣는 음악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철저하게 상대방이 된다. 그럼 어떻게 춤이 이루어질까? 내 몸이 스스로 알아서 반응하는 것을 그냥 두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의 움직임이나 표정을 본능적으로 따라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공감 능력 말이다. 티비를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배우의 표정을 따라하게 되는것도 그 사람의 감정에 동화했기 때문이고, 호감이 있는 사람이 대화를 하면서 턱을 괴면 나도 모르게 턱을 괴는것을 따라하게 되곤 한다. 내 몸은 그렇게 상대를 따라서 춤을 추게 된다. 내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상태가 가능한 이유는, 나는 이미 내 중심축을 가지고 있고, 몸의 섬세함이 발달되어 있고, 상대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몸에 익혀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 파트너 역시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내 안에는 상대만 존재하고, 상대에게는 나만이 존재한다. 이렇게 크로스 형태로 완성된 커넥션은 환상의 호흡을 맞출 수 있게 해 준다. 이 단계의 춤은 말 그대로 무아지경 속에서 추게 되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어 왔다.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가 너무 힘들었다. 그 안에는 자존감이 낮았던 이유와, 사랑받고 싶은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강한 트라우마가 있던 탓이었다. 그래서 관계에 대한 감각을 차단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아이러니 하게도, 내가 가르치는 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상담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춤추는 것처럼 살라고 말씀하셨다. 머리로 생각을 하지 말고, 느끼고 마음이 가는대로 상대를 대하라고 하셨다. 생각해 보면, 상대에 대해 늘 머리로 판단하려고 하고, 상대의 마음이 어떤지 머리로 추측하려고 해 온것은 아닐까. 내가 수업에서 여학생들에게 늘 말하는 것처럼, 머리를 버리고 마음으로 춤을 추라고 했던 말을 내 자신이 들었다. 머리는 표면적인 것들만 보게 한다. 보이지 않는 사이사이의 진동과 미묘한 감정의 설렘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내 안에 상대방만 존재하는 단계, 상대의 숨결 하나하나를 느끼는 섬세한 사이, 상대가 원하는 게 뭔지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배려, 나를 잊어도 된다는 믿음, 상대가 나에게 똑같이 해 줄거라는 신뢰... 내가 스스로 잘 서 있을 수 있다면 상대방에서 받을 기대 없이 온전히 베풀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상대가 나와 똑같이 나를 대한다면 내가 필요한 부분은 상대가 알아서 채워 줄 테니, 이쯤되면 완벽한 커플이라 할 수 있겠다. 가장 이상적이고 누구나 꿈꾸는 소울 메이트란 이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