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금단의 영역

단편 소설 ㅣ 곽정빈

by 한공기
KakaoTalk_20160508_223016445.jpg 싱클레어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또 좋아하는 책이 헤르만헤쎄의 데미안입니다. 그래서인지 평소 인간 본연의 양면성을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말을 곧 잘하곤 합니다.


작가프로필 ㅣ 곽정빈

저는 3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난 1년간 세계여행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두 눈을 황홀하게 채우는 수많은 풍경들보다도 여태껏 가져보지 못했던 무지막지한 혼자만의 시간을 대면해야 했던 것이 가장 큰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시간들을 글을 쓰면서 채워 왔습니다. 글을 쓸 때 비로소나 나 스스로가 나 다워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희미해져만 갔던 나의 자아가 글을 쓰면서 뚜렷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된 제 인생의 2막에서 지속적이고 전문적으로 글을 써나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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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질 않는다. 변도 잘 나오질 않는다. 물을 많이 먹으니 변소에 자주 가게 되었다. 이전에는 두 시간마다 옥상을 오르내리기라도 했지만 이제 그마저도 안 하니 일일 운동량마저 줄어든 셈이었다. 거기에다 애꿎은 사탕과 커피믹스만 연일 찾다 보니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속은 더부룩하고 배는 더 나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식후에 찾아오는 잇몸의 욱신거림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특히 맹맹하고 텁텁한 살코기류를 먹기라도 하면 그 감각은 더욱 배가 되어 느껴졌다. 짜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을 때면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지만, 그것도 먹을 때만 잠시일 뿐 식후에는 온 입안을 지배하는 얼얼함 때문에 눈을 뜨고 있기조차도 힘들었다. 담배를 하나 끊었을 뿐인데 이렇게도 많은 사이드 이펙트가 찾아오다니 그 대가가 너무도 가혹했다. 문득 군 이등병 시절 막사 뒤편 건조실에서 한 시간 동안 쌍욕을 먹이고선 사악한 미소와 함께 내게 담배 한 개비를 내밀었던 박 병장이 생각났다. 동기 말에 의하면 최근에 박 병장은 전자담배 가게를 차렸다고 했다.


물론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침 출근길 사무실로 올라가는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숨을 마음 편하게 내쉴 수 있다는 것만큼은 거의 유일하게 인정할 수 있는 좋은 점 중의 하나였다. 부리나케 탑승한 만원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코를 집게손가락으로 눌러 쥐고선 눈살을 찌푸리는 여사원들을 보며 민망함을 느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후에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마치 망망대해에 빠져 허우적대는 표류자처럼 나는 들이마신 숨을 공중으로 조심스레 뿜어대야만 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담배 냄새가 좀 난다고 하기로서니 그렇게 온갖 티를 내며 불편을 호소했어야 했나? 갑자기 그 여사원들이 너무 괘씸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하다 하다 못해 일 평 남짓한 좁은 엘리베이터 안까지 내몰려 인간의 생존권조차 박탈당한 흡연자의 처지를 생각하니 금연을 결심한 것이 차라리 잘한 일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결심도 종종 무너져내렸다.


그렇게 혀를 끌끌 차며 10시께나 도착하기로 한 고객사 부장을 마중 나와 있던 회사 밖 일층 자판기 앞이었다.


"저기...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금연을 시작한 지 이주 째 라이터 따위가 있을 리가 없... 있다.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것은 분명히 라이터임에 틀림이 없었다. 적당한 마찰감이 느껴지는 매끄러운 표면, 둘레를 부드럽게 감싸는 곡면의 네 모서리, 물체 머리 부분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질감은 주머니 속의 물체가 라이터임을 여실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녹색? 파란색? 느껴지는 감촉으로 색을 구분해낼 수 있을 리 없지만 두툼한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적절하게 데워진 라이터는 왠지 빨간색일 것 같았다. 그나저나 라이터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겨우내 장롱 깊은 곳에서 코트와 함께 근 일 년 동안의 동면을 취하다 인제야 세상 밖으로 나온 놈일까? 문득 일 년을 묵혀둔 라이터가 과연 켜질지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라이터의 태엽 위로 엄지손가락을 얹었다가는 이내 다시 떼어냈다. 500원짜리 라이터의 동작을 검증하기 위한 대가로 코트의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해서 라이터의 출처를 추적한다. 어젯밤 노래주점 테이블 위에 있던 라이터를 무의식적으로 집어왔나? 그렇다면 이 라이터에는 '팬텀 노래주점'이라고 마킹이 되어 있는 걸까? 진한 눈화장, 검은 숏컷 머리, 계속해서 눈길을 끌었던 회색의 목 밴드, 민아였나 민지였나... 그녀는 연신 발랄한 목소리로 내게 자신의 이름이 아이돌 가수의 그것과 같다고 강조했는데, 정작 입사한 지 두 달이 넘어가는 회사 경리 아가씨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였다. 그녀가 필요 이상의 노력을 했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미안해져 이내 얼굴을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똑똑히 기억나는 건 그녀의 잘록한 허리와 매끈한 허벅지뿐이었다. 어느새 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머니 속의 라이터를 빙빙 돌려가며 만지고 있었다.


눈앞의 사내를 바라본다. 불을 빌려줄 거면 군말 없이 빌려줄 것이고 싫다면 말 것이지 그저 말없이 쳐다보는 사람 때문에 사내는 적잖이 당혹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조급할 필요 없다. 담배. 불이 없이는 그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는 한낱 담배 한 개비. 그 생명의 불을 가진 자는 나. 번갯불에 의해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치켜들며 만물의 영장 자리를 꿰어찬 최초의 인류처럼 나는 득의양양하게 라이터를 쥔 채로 사내 앞에 서 있다.


사내의 목을 타고 내려온 붉은 목줄의 흰 글자를 읽는다. 목줄은 자신의 주인이 이 건물 내에서도 야근이 많기로 유명한 B 네트웍스의 사원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피부의 상태와 차림을 보아하니 끽해야 20대 후반이다. 점심시간까지는 아직 멀었고 오피스텔 11층에서 13층을 사용하는 회사의 말단 사원이 굳이 15층 옥상을 피해 건물 앞까지 담배를 태우러 온 이유가 뭘까. 왠지 알 것만 같아 짠했다. 지금 당장 담배를 태워야겠는데 담뱃불이 없을 때의 난처함, 난생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담뱃불을 빌려야 하는 수고스러움. 그 불편까지 공감하고 나니 그제야 그에게 불을 선사해주기로 마음먹는다.

'옜다'

사내는 고개를 숙이며 두 손으로 라이터를 건네받아 조심스레 담뱃불을 붙였다. 그렇게 라이터를 되돌려 주면서 한 번 더 고개를 조아렸는데 마치 담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라이터를 챙기지 않은 자신의 부주의함을 자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새빨갛게 타들어 가는 담배 머리를 본다. 타닥타닥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세상의 모든 근심을 품은 듯 사내는 한껏 담배 연기를 폐 속 깊은 곳까지 밀어 넣었다가 뱉어냈다. 흰 담배 연기가 사내를 휘감았다가 이내 곧 허공으로 사라졌다. 여자친구와의 다툼과 치솟는 전셋값과 상사의 나무람이 하얀 연기가 되어 하늘로 번져갔다. 담배를 태우는 1분 남짓의 시간 동안이라도 사내의 근심을 잊게 했음을 생각하니 왠지 스스로가 뿌듯해졌다. 이마 위 땀이 송송 맺힌 공장 인부들의 두 손가락 깍지 사이에 들어찬 담배 한 개비. 고된 야근을 마친 귀갓길에 회사 동료와의 사이를 밝혀주는 담뱃불. 가끔은 담배만큼 인생의 공백을 멋들어지게 메워주는 것이 어디 또 있을까 생각한다.

그때 갑자기 또 욱신거림이 찾아왔다. 잇몸과 치아 사이의 매음 새를 따라 욱신거림은 점점 전이 되어갔다. 동공이 흔들리고 콧구멍이 벌렁거린다. 마른 침을 꼴깍 삼킨다. 마치 사형수의 목을 향해 맹렬히 떨어지는 단두대처럼 윗니는 아랫니를 향해 수차례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황소개구리 마냥 양 볼에 바람을 한껏 불어넣어 가글을 하며 외투의 양쪽 주머니와 속 주머니를 모두 뒤져 보지만 야속하게도 껌 반 조각조차 나오질 않았다.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다 아까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사내는 멋쩍게 웃음을 흘리며 다시금 고개를 까딱하고선 담배를 다시 태웠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 불이 없었으면 그 담배도 태우지 못했을 것 아닌가? 순간 사내가 배은망덕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기어코 두 번째 사내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착각일까? 마치 사내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보이는 듯했다. 실상은 말이 안 통하는 상사도 회사 동료도 아닌 진정 인생 선배의 조언을 구하고자 이곳까지 내려온 것은 아닐까? 하긴 업무시간에 혼자 나와 담배를 태우는 만큼 또 청승맞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다가 회사 상사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그 난감한 상황을 상상하니 되려 내가 난감해졌다. 순간 이 사내가 내게 담배를 권한다면 한 대 즈음은 태울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쫓기는 경찰을 피해 숨어든 군중에서 낯선 여자와 입맞춤을 하는 삼류 액션물을 생각한다. 병신같아 피식 웃었다.

주위를 둘러본다. 아직 부장을 만나기로 한 시간은 십분. 그래 이 빌어먹을 십 분이 남아있었다. 맞은 편 등나무를 본다. 환풍기 뒤편을 본다. 차들이 정차해 있는 도로변을 본다. 익숙한 얼굴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세상에 담뱃불을 빌리는 사람은 있어도 담배를 빌리는 사람은 노숙자 빼고는 없다 하지만 난 그대에게 불을 빌려주지 않았나?불을 빌려드렸으니 담배 한 개비정도야 빌릴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니 아니지. 담배는 빌리는 게 아니지.


맹렬하게 마지막을 향해 타들어 가는 사내의 담뱃불을 바라본다. 이미 반대편 손은 켜져 있던 스마트폰의 전원 버튼을 눌러버렸다. 사내는 이윽고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마지막 숨을 깊게 빨기 시작했다. 침을 꼴깍 삼키며 사내를 쳐다보고 이윽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양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이면서 사내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저기.."


사내는 담배를 입에서 뗀 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본다.





"이 라이터 가지세요"


사내의 어깨너머로 김 부장이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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