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귤>에 관한 짧은 이야기 ㅣ 해원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4-01 오후 2.14.40.png 지구여행자


작가 프로필 ㅣ 해원

현재 요가원에서 일하면서 요가를 배우고 있고, 주말에는 종종 커피숍에서 일하고 있어요.

요가로 신체를 단련하고, 글쓰기를 통해 정신을 단련해서 초인이 되고자 합니다. (...)

필살기는 음... '머뭇거림...'입니다. -_-










내게 귤은 있으니까 먹는 과일이었다.

여느 집들처럼 겨울이면 귤이 상자째로 우리 집 베란다에도 있었다. 찬 바람이 불어 밖에 나가기 싫어지면 나는 집안에 빨래처럼 널부러졌다. 거실에 누워 티비를 보거나, 따끈한 방 안에 누워 이불 속에서 잡지를 뒤적일 때면 배경음악처럼 항상 옆에 귤이 있었다. 별로 맛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귤은 늘 집에 있었고, 그냥 입이 심심해서 먹는 쪽이었다. 그래서 딱히 귤을 좋아한다거나 특별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에 취업을 했다. 서울에 올라와 작은 방에 나만의 살림을 꾸렸다. 꿈꾸던 독립과 새로운 생활에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1인가구의 고독감이 어느새 내 것처럼 익숙해졌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별처럼 반짝거린 날도, 희미하게 바랜 먼지같은 날도 모여서 바쁘고 정신없이 세월이 흘렀다. 저 혼자 똑똑한 체 세상에 치기어린 시선을 보낼 줄만 알았지, 엄마 밥 먹으면서 학교만 다녔던 나는 혼자서 잘 챙겨먹는 타입이 아니었다. 누가 챙겨주면 먹고, 없으면 그런가보다 방치했다. 요리를 하겠다고 식재료를 사서는 해먹는 양보다 폐기하는 양이 더 많았다. 그 후로는 집에는 저장성이 있는 건조한 식품만 놔두었다. 그와 함께 내 몸과 마음도 건조해갔다. 겨울이면 건조한 피부를 위해 새로 나온 화장품을 발라보아도, 동료가 소개해 준 피부 관리를 받아보아도 부족한 수분을 채울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혼자 사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데, 그 친구는 귀엽게도 마트에서 귤을 한 줄씩 사먹고 있었다. 아, 귤을 저렇게도 사먹을 수 있구나. 그제서야 나는 한동안 귤 없이 겨울을 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 뭔가 허전했었어. 그게 뭔지 몰랐었는데. 어딘가 내가 메말라가는 이유를.

겨울이면 내 손이 닿는 곳에 귤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구나. 내가 구하지 않으면 없구나. 둔감한 나는 귤의 부재를 느끼지도 못했었는데. 사실은 그런 작은 것들, 그러니까 겨울이면 뜨끈한 방바닥에 누워 귤을 까먹는다든가 하는 것들이 모여서 나를 이루어 왔구나. 그것들이 오랫동안 멈추어 있었어. 문득 어린 시절 어렴풋이 맡은 귤 냄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흔하고 사소한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은, 지독한 결핍을 충분히 견디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받는 호의와 관심과 사랑이 베란다에 쌓인 귤처럼 넘쳐나던 시절도 있었다. 그 때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귀찮아 했었지, 어쩌면. 언제든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을 줄 알았지. 흔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마음과 정성이 모여서, 시간과 공간까지 맞았기에 내게 선물처럼 주어졌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게 되고, 한 번도 제대로 감사를 느끼지도 표현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시간의 간격으로 생겨난 커다란 마음의 구멍. 그것을 다시 메우려는 고통의 크기만큼 또 다시 오랜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 그러면 나는 좀 더 사람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

나는 기억한다. 늘어지고 게으른 거실의 따뜻한 공기를, 담요 대신 깔던 황금색 이불을, 쟁반을 주며 귤 좀 담아오라던 엄마의 목소리를, 잡동사니로 정리되지 않은 아파트 베란다를, 창문에서 두 걸음 떨어져 항상 같은 위치에 놓여 있던 귤 상자를, 촌스러운 진녹색 커튼을 걷고 베란다 문을 열면 느껴지는 얼음장같은 한기를, 슬리퍼가 차가워 까치발을 들던 것을, 살짝 무른 것이 있나 살펴서 먼저 먹어야 할 귤로 골라 담던 번거로움을, 남은 귤 껍질을 그냥 버리지 말라던 엄마의 잔소리를, 밖이 춥다며 내복을 입었는지 묻는 아빠에게 이제는 안 입는다고 시큰둥하게 답하던, 이 모든 시간이 주는 유년기의 귤 냄새를. 나는 기억한다. 한 때는 공기처럼 내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을.

내게 원래 귤은 있으니까 먹는 과일이었다. 귤을 특별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가 무슨 과일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귤을 좋아해요, 라고 말하고 싶다. 이유를 물으면, 소박하고 흔해서 그래서 내가 좋아해요. 오늘은 입 안에서 싱그럽게 터지는 그 맛을 음미하고 싶다. 이번 겨울에는 귤을 사서, 당신과 나누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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