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WORD ONE PAGE <술> ㅣ 김연정
즐거운 감정은 빨래가 마르듯 금방 날아가 버리고, 우울한 감성, 생각들은 언제나 침전하여 남아있음을 느낍니다. 우울함, 불안함, 슬픔, 좌절감에 예민하고 행복에 예민하지 못한 제 자신이 조금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느껴지지만, 아직까지는 수면 위 햇살보다는 우울한 바다 쪽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어두운 것들이 가라앉아 있는 심해心海 속을 당분간 탐구하면서 글을 써 볼 예정입니다. 언젠가는, 나를 힘없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예민함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에게로 자리를 옮겨가길 기대합니다.
집에 가는 길, 허기가 져서 걸음을 빨리하는데 역 앞에 어묵집이 눈에 띈다. 평소에 스쳐지나가면서 언젠가 한 번 가봐야지 했던 곳이었는데 마침 한산해보이기에 얼른 들어갔다. 터질 것 같은 어묵꼬치들을 보고 있자니 왜 사람들이 항상 많았는지 알 것 같다.
본격적으로 먹기 전에 국물을 먼저 종이컵에 담아 살짝 들이킨다.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가슴 언저리까지 뜨거워진다. 호흡이 느려지고 눈이 감긴다. 아, 이 국물! 사실 나는 어묵 자체가 좋다기보다 이 국물을 종이컵에 담아 마시는 게 좋아서 가끔 어묵을 사먹는다. ‘그래, 추운 날 이렇게 서서 먹는 어묵이 최고지’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술 생각이 났다. 아니 정확히는 식사 후에 2차 자리로 갈 법한 이자카야나 오뎅바같은 곳에서 나란히 앉아 먹는 그 분위기가 떠올랐다. 아마도 사람들 사이에 서서 나란히 어묵을 먹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무튼, 믿고 싶지 않지만 벌써 올해도 끝나가고 있고 길거리의 연인들은 유독 더 불어난 것 같고 사람들은 약속으로 분주해 보인다. 인스타에서는 테이블 위 술 사진이 한 가득이다. 오늘처럼 갑자기 시간이 생겼을 때 불러낼 수 있었던 동네 친구들은 요즘 데이트하느라 바쁜 것 같고, 불러낼만한 다른 친구들과 번화가에서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곤하다. 집에 가는 길에 캔맥주나 하나 사갈까 하다가 맥주가 그다지 당기지 않아서 관두기로 했다.
가끔 캔맥주는 쉬워서 재미가 없다. 지금 별로 먹고 싶지 않아도 내키면 집 앞 슈퍼에서 언제든지 데려올 수 있으니까 계획된 술자리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고, 맘 놓고 변덕부려도 된다. 쓰고 보니 조금 미안하다. 혼자 널 마시면서 즐거웠던 날들이 꽤 많았는데 쉽다고 별로 내키지 않는다니. 네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내게 소중함을 모른다고 할까. 하지만 너는 나 말고도 다른 누군가에게도 계속 가버릴 테니까, 몇 푼이면 뒤도 돌아보지 않을 테니까, 거기에는 조금의 미련도 없을 테니까 미안하지 않아. 나는 네가 그 투박한 알루미늄 껍데기를 벗고 누군가가 건넨 잔에 담겨있는 것을 원해. 어떤 시간, 어떤 사람에 의해 특정한 자아로 태어난 너의 모습을 원한다. 절대 시간, 절대 장소, 절대 사람. 그 세 꼭짓점에서 뻗어 나온 선에 중첩된 절대 지점, 절대적인 너의 모습!
그래도 권태기는 결국 끝나기 마련이다. 어쨌든 요즘 심경변화에 따르면, 캔맥주와의 약속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필요한건 바에서 먹는 술이라고! 아무리 혼자 술을 즐길 수 있는 장소가 많이 생겼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술을 파는 카페를 제외하고는 용기가 나질 않는다. 홀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바의 문턱을 넘을 자신이 없다. 그리고 혼자 술을 마시면서 무얼 해야 한단 말인가. 식사도 아니고, 안주를 씹으면서 술을 마시면서 외치고픈 말들은 묵언으로 수행해야 하는가. 깨달음에 의해 ‘할!’이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내 말들을 누군가 씹어 먹고 다시 내게 뱉어내길 원하는데, 그렇다면 술이 필요한 건가 사람이 필요한 건가.
빈속에 먹는 술은 쓰리고 잔에 담기지 못한 술에는 사연이 없다. 곁들일 음식이 필요하고, 나눌 누군가가 필요하고, 분위기를 환기해줄 장소가 필요하다. 깡통에 담겨 획일화 된 모습으로, 부화하지 못한 알 속 생명체처럼 편의점에서, 슈퍼의 진열대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너. 약간은 측은하고 조금은 나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닮으면 서로 끌린다고 했었나. 오늘은 어쩌면 어묵을 먹다가 그 진리를 깨달았는지도 모르겠다.
할! 내가 너를 특정지어줄게.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해주겠다. 그래서 나는 결국 캔맥주를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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